병문안을 온 동네 아저씨에게 하는 아빠의 말을 들은 동생은 마음이 참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 얘길 들은 내 마음도 그랬다. 열다섯 살의 어린 아빠가 생각나 가여워 눈물이 핑 돌았다.
아빠는 내내 일만 하셨다. 아빠의 직업은 농부다. 봄에 농사 준비를 시작해 초여름에 한 번, 늦여름에 한번 한 해에 꼭 두 번의 수박농사를 지으셨다. 그 사이 논에는 벼를 심었다.
두 번의 수박이 끝난 하하우스엔 가을 쪽파를 심는다. 한겨울엔 보일러나 수도를 고치셨고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일도 하셨다. 지금의 내 남편보다 어렸던 내 기억 속의 아빠는 항상 일이 많았다.
암에 걸리신 아빠는 그동안 너무 일만 한 자신의 삶이 좀 아쉽다는 생각을 하시나 보다. 그리고 이제라도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셨나 보다. 먹고 싶은 건 이미 맘대로 못 먹고(당뇨가 있으시다), 코로나로 가고 싶은데도 맘대로 못 가니, 사고 싶은 거라도 사야지 하는 마음이 생겼나 보다.
항암을 위해 병원 입원을 앞두고 우리 집에 온 아빠 눈에 띈 세 가지가 있다.
청소기가 혼자 청소하고 충전하러 간다고?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아빠는 로봇청소기를 눈여겨보셨다. 혼자 여기저기 다니며 먼지 청소를 하고 걸레질을 한 뒤 청소를 마치면 스스로 충전하러 가는 녀석을 한참 동안 구경하셨다.
핸드폰으로 몇 번 터치하면 집 밖에서도 청소를 시킬 수 있는 (아빠 딴엔) 최첨단 기술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이번에 집에 내려가면 당장 사야겠다”
"엄마한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사면 아빠가 청소도 하고 그럼 되지 뭐"
"그려~ 그럼"
엄마에게 로봇청소기를 사도 되냐고 살짝 물었더니 절대 사지 말란다. 에라 모르겠다. 아빠만 좋음 됐지 뭐.
“이케아 유리 닦기 10개 주문해줘”
아빠가 화장실에 들어가시더니 삑삑 유리창 닦는 소리가 난다. 그러더니 유리 닦기를 가리키며 이거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신다. 이케아에서 파는 릴라겐 유리닦이. 단돈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이케아 쇼핑 필수템이다.
“이케아에서 파는 건데, 그거 좋지? 천 원짜리야. 엄청 싸지? 거울 닦기도 좋고 바닥 물기 없애기도 좋아. 이케아는 큰 가구점 같은 덴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몇 년 안 됐어. 매장도 몇 개 없고. 거기 가면 아빠가 좋아하겠다.”
아빠 눈에서 빛난다. 집에 있는 이케아 잡지를 갖다 드리니 한참 들여다보신다. 그러더니 이케아가 여기서 얼마나 걸리는지, 이케아에서는 뭘 파는지, 공구들도 있는지(아빠는 공구를 좋아하신다.) 왜 그렇게 큰지 등 한참 질문을 쏟아내셨다. 이케아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유리 닦이 10개를 사서 몇 개 쓰시고 남은 건 동네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고 싶다며.
그날 오후 입원을 하지 못하고(대학병원은 병상 자리가 나야 입원을 할 수 있다. 입원 예약일에 병상이 안 나면 날 때까지 무한 대기다) 동생을 불러 집에 돌아가시던 아빠는 근처에 이케아라는 데가 있으면 들렀다 갈 수 있겠냐고 물어봤단다.
동생은 코로나 때문에 위험하니 그냥 집으로 가자고 했다. 며칠 후 입원한 아빠의 퇴원을 위해 우리 집에 들렀던 동생은 다시 아빠 병원에 가기 전에 이케아에 들러야 한다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리고 릴라겐 유리 닦기 6개를 샀다. 아빠는 그걸 기념품처럼 동네 아저씨들에게 돌렸다고 한다.
창고 속 아빠의 자동차
동네에서 밥을 포장해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주차장의 차가 아빠의 눈에 들었다. 아빠 시골 동네의 유행 선도자인 주유소집 아저씨가 가진 V사 자동차였다.
"이게 그 자동차구먼"
"그렇네~ 이게 좀 작은 거고 저기 저건 좀 큰 거네"
"구경 좀 해도 되나. 이게 사고 나도 사람 안 다치고 엄청 튼튼하다며"
아빠는 남의 차를 한참 들여다보셨다. 남의 차를 한 바퀴 빙 돌아가면서 구경하셨다.
"아빠, 저거 곧 전기차가 나온대"
"그건 얼마여"
"이따 찾아봐줄게"
올라와서 가격을 찾아봐서 알려드렸더니 아빠가 말했다. "그거 나오면 사야겠네"
지금 아빠가 타는 차는 아빠가 산 첫 새 차였다. 25년 전 아빠의 첫 자가용(일할 때 쓰시는 트럭을 빼면)은 하얀색 갤로퍼였다. 4남매를 둔 아빠가 무슨 생각으로 2인용 갤로퍼를 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아마 가격 때문이지 싶다. 가끔 갤로퍼 뒤 트렁크에 타고 등교할 땐 내릴 때 창피해했던 기억이 난다.
아빠의 두 번째 차는 새 차 같다는 말을 듣고 지인에게서 구매한 중고 SUV였다. 지금의 세 번째 차를 사기까지 친정집엔 한참 동안 현대차 브로슈어가 있었다. 그렇게 오래 갖고 싶어 하고 생각만 하다 산 차였다.
지금도 아끼느라 항상 창고에두어서 여전히 새 차 같다. 엄마는 그때도 차가 있는데 왜 새 차를 사냐고 말했지만, 아빠는 평생 탈 것처럼 그 차를 사셨다. 다시 차를 산다고 하면 엄마가 결사반대할 게 눈에 선하다.
이제 먹고살만하니 이렇게 됐다는 아빠가 한 말을 듣고 나니 왜 그렇게 아빠가 사고 싶은 게 많아졌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래, 이제 대학교 보낼 자식이 더 있는 것도 아니고, 막내아들 장가야 알아서 가겠지. 아빠가 열심히 번 돈의 쓰는 재미도 좀 아셨으면 좋겠다. 은행에 몇 푼 더 있다고 아빠가 더 행복해질 것 같지 않다.
아빠가 당장 몇 년 밖에 못 사신다면, 지금 사고 싶은 걸 빨리 사서 쓰면 좋겠다. 치료가 잘돼서 오래 사신다면 더더욱 사고 싶은 걸 사서 오래오래 잘 쓰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생각해도 사고 싶은 건 사는 게 맞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