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인을 한 다음 날, 다들 뭐라도 해야 했다. 정리를 하기로 했다. 엄마는 갑자기 딸들이 막 정리를 시작하니 돕긴 했지만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얼마간은 그대로 두고 싶으셨던 걸까? 하지만 우리가 떠나고 혼자 남아 아빠 물건을 정리하다 울 엄마가 걱정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작은 방에서 나온 새 공구함. 이건 뭐냐고 물었더니 아빠가 설날에 사신 거라고 했다. 아빠가 3개월 남았다는 얘길 들은 뒤였지만 그걸 정작 본인만 몰랐다. 내가 보기엔 아빠의 다른 드릴과 비슷하지만 뭔가 다른 게 있겠지. 아빠가 사고 싶었던 걸 샀다면 그걸로 됐다. 결국 한 번도 쓰지 못하셨지만.
아빠가 타던 차는 아빠가 산 첫 새 차였다. 엄마는 내게 아빠 차를 쓰라고 했지만 운전 경력 3년째 여전히 초보인 내가 타기엔 커서 부담이 됐다. 다들 모인 자리에선 그 차를 팔기로 했지만, 엄마는 그러고 싶지 않았나 보다.
어찌할까 하다 결국 막내가 타기로 했다. 막내가 타던 차는 내가 타고, 내가 타던 작은 차는 엄마가 타며 운전연습을 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내 차로 용서고속도로(분당 서울대병원 가는 길)만 타면 아빠 생각이 나 눈물이 났는데 차라리 잘됐다. 언니는 남들은 있는 면허도 반납할 나이에 엄마가 운전을 시작한다는 것에 반대했지만 난 생각이 달랐다. 엄마의 남은 인생을 위해서라도 운전은 해야 한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집 마당에 가득한 연장이며, 쇠파이프며, 볼트며, 나사며 쓰임을 알 수 없는 공구들은 어쩌나. 트럭 1대, 예초기 3대, 트랙터 2대, 경운기 등등 아빠는 다른 건 몰라도 연장 욕심이 있었다. 집에서 TV로 유튜브를 볼 수 있게 됐을 때도 아빠는 연장을 찾아보셨다고. 아빠가 지금 태어났으면 아마 공대 남자가 됐겠지.
아빠는 겨울에도 쉬는 날이 며칠 안될 정도로 바빴다. 수도가 터지거나 보일러가 고장 나면 동네 사람들은 꼭 아빠를 찾았다. 사람들은 아빠에게 집도 고쳐달라고 했다. 어디 먼 동네에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거절하라고 해도 아빠는 그런 건 잘 못하는 사람.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 나서 전화한 사람한테 어떻게 그러냐고. 아빠는 그런 일이 재미있다고 했다. 그게 정말이었을까?
아빠가 남긴 건 죄다 그런 것이었다.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니 아빠의 인생을 보는 것 같았다. 별다른 좋아하는 것도 없는 아빠 인생에서 생계를 잇는 일 중 하나였던 뭔가를 고치는 일이 그나마 즐거웠기를 뒤늦게 바랄 뿐이다. (아빠의 원래 직업은 농부 입니다만)
아빠를 보내고 난 뒤, 나는 일은 해서 뭐하나 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가 결국 다 됐고 건강이 최고네 싶어 운동을 열심히 하기로 했으면서도 먹는 건 그렇게 건강하지 못하게 먹고 있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즐겁게 살아야지 싶어 먹고 싶은 거 먹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또 다음 날은 그래도 이건 너무하네 하고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도 한다.
아빠가 남긴 것들을 보며 내가 죽은 뒤엔 뭐가 남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단 뭐가 남든 간에 정리는 좀 해야 남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지 싶다. 우선 사진부터 정리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