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순전히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아빠는 4남매 중 나를 예뻐했다. 조용한 우리 집에서 유독 나만 다른 성격인 탓에 어릴 때 손님이 오면 아빠는 나를 불러 노래를 시키곤 했다. 나는 자다 일어나서도 노래를 불렀는데(그런 걸 내가 싫어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나의 둘째 아들은 나를 꼭 닮았다. 할아버지 무릎에 먼저 앉고 보는 둘째 손주에게 아빠는 성하지 않은 몸을 내주면서도 웃곤 하셨다. 나를 보듯 둘째 보는 마음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얼굴이 아빠를 닮았다. 생김생김이 누가 봐도 아빠 딸이다.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보면 영태 씨네 딸이네 할 정도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엄마랑 밭에 갔다가 혼자 집에 오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또 그러셨다. 아빠랑 닮았다고.
어릴 때 기억이 잘 안나는 편인데, 이 기억은 있다. 눈감고 누워 있는 나를 아빠는 번쩍 안아 다른 방에 옮기셨다. 나는 내내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내려놓으니 그제야 "아~ 재미있다"라고 했다. 그게 내 아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그때 아빠는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빠에게 자식 중 누가 가장 좋냐는 질문 따위는 해 본 적이 없어서 진짜 아빠의 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혹은 이게 순전히 둘째 딸의 착각이라고 해도 아빠는 분명 나를 아꼈다. 나는 쭉 그렇게 생각해왔다.
아빠에게 혼난 적이 있던가? 별로 그런 적도 없는 것 같다. 아빠가 엄마랑 투닥거리시긴 했어도 싸움 한 번 없었던 집이다. 4남매 역시 서로 싸우기도 하며 컸지만 엄마 아빠가 우리를 크게 혼내신 기억은 없다.
내게만 특별했을 리 없지만, 분명 정말 특별했던 우리 아빠.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부터는 아빠랑 계속 떨어져 살았으니 지금의 아빠의 부재가 잘 믿기지 않는다. 실감이 안 난다는 말이 딱 맞다.
그냥 일상을 살다가 문득 아빠 생각이 종종 난다.
그럼 갑자기 눈물이 핑 돌고, 아빠가 돌아가셨음을 깨닫기를 반복하는 거다.
자려고 누우면 잠이 잘 오지 않는데 그럼 또 아빠 생각에 이른다. 그럼 또 혼자 운다.
아침에 부운 눈을 보며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밤이 되면 또 잠이 잘 안 오고 또 아빠 생각이 난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몇 주 지나 꿈을 꿨다. 아빠가 나왔는데, 어릴 적 자주 가던 우리 집 밭이 잘 정리가 돼 있었고 아빠가 거기 서 계셨다. 내가 가서 아빠 손을 잡아드리니까 아빠가 환하게 웃으셨다. 그 얼굴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아빠의 거친 손을 잡고 밭을 걸었다. 그 길이 하늘나라에 가는 길이었을까. 마지막 길에 아빠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 걱정이라던 딸을 보러 오셨던 걸까?
딸 걱정은 마요. 꼭 아빠같이 뭐든 잘 고치는 자상하고 성실한 남편 만나서 남편 같은 아들 하나, 나 같은 아들 하나 낳아서 잘 살잖아. 내가 나중에 아빠 만나러 가면 그 손 또 손 잡아드릴게~ 가시기 전 아빠 꼭 안아드리지 못한 게 영 한이 되는데 그것도 그때 해드릴게.
거기서는 이제 일 그만하고 우리들 잘 사는 거 보면서 쉬어요. 푹 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