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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22. 2019

애 볼래? 밭 맬래?

나만 힘들다는 착각

그 자리에 여자는 5명이었다. 손주 육아로 대상포진에 걸리신 고모 이야기가 나왔다. 고모는 일하는 사촌오빠와 그의 아내를 대신해 2년 전부터 손주들을 돌봐주고 계셨다. 그러다 몸이 점점 안 좋아지더니 결국 대상포진에 걸리셨단다. 대상포진의 악명 높은 통증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와 면역력 약화가 의심이 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황혼의 손주 육아가 대상포진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참 육아 중이던 나는 절대적으로 공감했다. 고모의 힘들었던 육아가 안쓰러웠다. 그러다 내가 물었다. 그럼 "그럼 다들 아기 보는 것과 일하는 것 중에 뭘 선택할 거야? 다시 말해, 애 볼래? 밭 맬래?" 그 자리에 있던 엄마, 작은엄마, 언니, 나, 여동생은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언니는 애를 본다고 했다. 몇 년째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난임 휴직 중이던 언니는 시험관 시술을 준비 중이었다. 아이들이 크는 내내 미용사로 일했던 작은 엄마도 아이를 보겠다고 했다. 미혼의 동생도 아이를 선택했다.


나는 '밭 맬래'였다. 일 한다는 얘기다. 내 전업 육아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친정이든 시댁이든 누구든 나의 육아를 도와줬다면 나는 분명 회사를 다녔을 거다. 한국의 워킹맘이 조력자 없이 회사에 다니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다니던 회사의 여직원들은 다 그랬다. 그러면서 나는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한참 듣고만 있던 엄마가 말했다. "너네는 진짜 밭을 안 매 봐서 그런 얘기하지. 한여름에 하우스에 들어가서 일 안 해봤으니까." 그 자리 있던 5명의 여자 중 정말 밭을 매 본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출처 : http://www.freepik.com

농사를 지으시는 나의 부모님은 4남매를 키우면서도 딸들에겐 농사일을 거의 안 시키셨다. 얘기를 하신 적은 없지만 딸들이 나중에 힘든 일을 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거다. 그래서 막내인 아들은 불만이 많았다. 지금도 막냇동생은 일손이 부족할 때마다 아빠의 부름을 받는다.


진짜 밭을 매 봤냐는 엄마 앞에서 더는  육아의 고충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한여름 수박 농사를 위해 들어만가도 숨이 턱턱 막히는 비닐하우스에서 더위와 싸우는 엄마를 앞에 두고 말이다.


'애 볼래? 밭 맬래?'라는 질문을 하며 나는 나 힘든 것 좀 알아달라는 얘길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육아는 고모대상포진에 걸릴 만큼 힘든 거라는 생색을 내고 싶었나 보다. '내가 이렇게 힘든 육아를 하고 있다. 수고한다고 얘기해줘, 대견하다고 토닥여줘' 하고 말이다. 농사를 지으며 아이 을 키운 엄마와, 미용실을 하며 아이 둘을 키운 작은 엄마, 아이를 갖고 싶어 직장을 쉬고 시험관 시술을 하는 언니에게 나의 투정은 어떻게 들렸을까?


내 일이 세상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만성 두드러기를 앓고 있는데 이건 일할 때 생겼다. 낮엔 멀쩡하다 저녁이 되면 스멀스멀 올라와 온몸을 휘감는다. 밤새 그 가려운 고통과 싸우며 내일 아침은 정말 출근을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두드러기는 그렇게 수개월 나를 힘들게 하고 사라지곤 했다.


지금의 두드러기는 다시 올라온 지 1년 3개월쯤 됐다. 둘째의 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두드러기는 치료약이 있는 게 아니라 항히스타민제를 먹으며 낫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고 숨통이 좀 트였다. 1년이 넘도록 이틀에 한 알씩 먹던 약을 먹지 않은지 오늘로 딱 일주일이 됐다. 이번 두드러기는 좀 오래갔다.


늘그막에 손주를 보다 대상포진에 걸린 고모의 고단함과, 밭일을 해가며 4남매를 키운 엄마의 고단함의 경중을 가릴 수 있을까? 아이를 갖고 싶어 휴직을 하고 시험관 시술을 하던 언니의 간절함과 육아에 전념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 한쪽에 남아있는 일에 대한 나의 간절함을 비교할 수 있을까?


애를 보는 이도, 밭을 매는 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지금 그 선택을 책임지고 있을 뿐이다. 애를 봐도 힘들고, 밭을 매도 힘들긴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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