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내 엄마] 작게 오그라든 엄마의 등과 전쟁의 상처
“엄마 오늘 정말 쑥 많이 했네. 그지?”
“그래. 많이 했다.”
양 손에 들린 봉지에서 쌉싸름한 쑥 내음이 물씬 풍겼다. 쑥을 다듬고 씻어서 이번 엄마 생신에도 쑥버무리 떡을 해 드릴 수 있게 돼서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엄마도 나도 오늘 뜯어온 쑥 ‘전리품’에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 한 분이 “쑥 냄새가 너무 좋네요.” 그 말에 또 어깨가 으쓱해졌다.
동그스름하게 작게 오그라든 엄마의 등에 봄 햇살이 살포시 앉아 있었다. ‘우리 엄마 언제 저렇게 작아졌을까.’ 요즘 들어 부쩍 드는 생각이다. 우리 자식들은 저 작고 오그라든 엄마의 등처럼 든든한 등을 알지 못한다. 한없이 푸근하고 모든 걱정 근심 막아줄 것 같은 북경의 만리장성보다 든든한 엄마의 등. 새하얀 배꽃과 복숭아꽃 아래 동그랗게 말린 내 엄마의 등…. 갑자기 엄마의 등이 사라졌다. 주책맞게 떨어지는 눈물 속에 엄마의 등을 잠깐 잃어버렸나 보다. 쑥을 뜯는 시간보다 엄마의 등을 바라봤던 시간이 더 많았다는 것 아마 엄마는 모를 거다. 쑥 뜯는데 열중해서…
작년에 우연히 지나다 발견한 배 과수원. 의정부 송산동은 옛날부터 뱃골로 통했다. 동네 전체가 배 과수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모두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몇 년 전부터 의정부 송산동에도 개발 바람이 불어 드넓었던 논과 배밭은 포클레인에 의해 모두 쓸려나가고 멋대가리 없는 아파트들만 삐죽하니 들어서서 을씨년스러운 동네가 되었다. 그 와중에 밀려 나가지 않은 과수원 몇 집이 송산동 배밭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것이 또 그렇게 고맙다. 작년에 그중 한 배밭에서 사다 먹은 배가 어찌나 맛나던지 가을 내내 일주일이 멀다 하고 들락거리며 만원 이만 원어치씩 ‘봉지 배’를 사다 먹은 덕에 과수원집주인과 안면을 텄다. 오늘 얼굴을 기억하고 배밭에서 쑥 뜯는 것을 허락해 주니 그 또한 고마울 따름이다. 덕분에 오늘 엄마와 함께 배꽃, 복숭아꽃, 자두꽃, 사과꽃 흐드러지게 핀 과수원 밭에서 쑥도 뜯고 꽃구경도 하는 호사를 누렸다.
과수원 밭이라 거름을 먹고 자란 쑥은 칼로 도려내지 않고도 손으로 뚝뚝 뜯어도 될 정도로 무성했다. “언니 거긴 쑥 농장이야? 일부러 쑥을 재배하는 곳인 거 같아.” 사진을 보내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다. 쑥이 좋으니 신바람이 나서 우리 두 사람은 피곤할 줄도 모르고 말도 없이 각자 봉지 채우 느리 여념이 없었다. 고개가 아프다 싶어 고개를 들면 바람에 날아가는 배꽃 잎과 복숭아 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 앞에는 엄마가 있고… 참 눈물 나도록 고운 봄 날이었다.
엄마와 내가 뜯은 쑥을 합하니 반 자루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 과수원 사장님은 벌써 퇴근을 하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인이 나고 드는 것도 모를 정도로 쑥에 열중했나 보다.
주방 바닥에 쑥 봉지를 풀어헤치니 주방 바닥이 쑥산이 되었다.
“엄마 이렇게 많은 쑥으로 뭐 해 먹지? 떡을 하고도 한참 남을 것 같은데?” 쑥은 좋긴 한데 별로 해 먹을 게 없는 거 같아. 떡 하고 빈대떡 말고는 … 달리 해 먹을 게 없지?”
“왜 쑥국 끓여 먹는 사람들도 있어.”
“정말? 쑥 넣고 국을 끓여?”
“어휴…” 갑자기 엄마가 한숨을 내 쉬었다.
“옛날에는 이 쑥으로 밥도 해 먹었는데…”
“쑥으로 밥을 한다고? 쑥밥을 먹었다고?”
“그래.”
쑥밥을 해 먹는다는 얘긴 처음 들었다. 믿어지지 않아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것도 부족해 검색을 해보니… 어라. 정말 ‘봄내음 가득한 쑥밥’ 레시피가 줄줄이 올라온다.
“진짜 쑥밥도 해 먹네. 봄철 별식으로 많이 해 먹는다네. 왜 몰랐지? 근데 쑥밥이 그렇게 맛있어?”
“맛있긴 뭐가 맛있어?”
“여기 전부 맛있다고 하는데. 곤드레 나물밥처럼 하나 봐. 콩나물밥처럼 양념장에 비벼 먹네?”
“밥 위에다 쑥 조금 올려놓으니까 맛이 있나 보지?”
“그럼 엄마 어떻게 해 먹었는데?”
“엄마 어릴 때 그때 전쟁 나고 얼마 안 지나서 먹어 봤는데. 쌀이 없으니까 쌀 조금 하고 쑥을 잔뜩 넣고 밥을 하는거야. 쌀보다 쑥이 더 많으니 질깃질깃하고 맛이 있을 턱이 없지...”
엄마는 마치 지금 쑥밥이 앞에 놓여 있는 것처럼 진절머리를 쳤다.
“그렇게 맛이 없었어?”
“뭐가 맛있니 그게? 잘 씹히지도 않고 씁쓸한 게.”
“이따금 할머니가 쑥 하고 쌀가루를 섞어서 조물조물해서 쑥개떡을 해 주셨는데. 그건 좀 나앗지. 그렇다고 많이나 먹을 수 있나. 모가치 쥐어 주면 끝인데 늘 냠냠했지. 누가 오면 그걸 또 나눠주고 나면 또 먹을 것이 없었어.”
“그렇게 먹을 게 없었어?”
“없었지. 그때 먹을 게 뭐가 있니? 할아버지는 피난 나가고. 집에 할머니랑 나하고 이모들만 있는데. 먹을 게 있어도 어디서 나왔는지 중공군 놈들이 나타나서 다 뺏어가고.”
“아이고 참 그때 생각하면….”
엄마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올라오는 듯했다. 6.25 전쟁이 났을 때 엄마 나이 열두 살. 중공군의 폭격으로 엄마와 할머니만 남아서 살고 있던 시골집 담장이 무너지고 불에 탔다고 한다. 밤마다 들려오는 따발총 소리에 지금도 총소리 비슷한 소리를 들으면 무섭다고 했다.
엄마 나이 겨우 열두 살에 겪은 전쟁과 가난의 공포는 엄마가 나이가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남은 음식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가난에서 비롯된 일종의 '트라우마'다. 언제 또 배고픔을 겪게 될 지 모른다는.
몇 년 전 영화 ‘판도라’를 보고 나올 때도 엄마는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무서웠다고 했다. 발전소 터지는 소리가 꼭 총소리와 폭격 소리로 들렸다고. 캄캄해서 더 무서웠다고. 그때 엄마 손을 잡아 주는데 손바닥이 땀에 흥건히 젖어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의 전쟁 트라우마를. 엄마의 전쟁 트라우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었다. 평소에는 말을 안 하지만 가끔 이렇게 생각지도 못 한 것에도 엄마의 트라우마는 짙게 배어 있었다. 봄의 전령사인 향긋한 쑥에도 엄마에게는 트라우마였을 줄이야.
엄마 마음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처와 슬픔, 분노 또 기쁨 같은 것들이 얼마나 많이 켜켜이 앉아 있을까.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엄마의 속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더 엄마가 가엾고 안쓰럽다.
[202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