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내 엄마] 가족들의 싫은 소리, 이제는 서러워.
엄마가 이모네서 깻잎을 따왔으니 가져가서 먹으란다. 엄마네 집에 가니 엄마는 벌써 씻은 깻잎을 가지런히 손질하시는 중이었다. "네 건 저기 있다" 하면서 싱크대를 가리키신다. 깨끗하게 씻어 놓은 깻잎이 소쿠리로 하나다.
"저렇게나 많이 주시는 거야? 근데 엄마, 하는 김에 다 해서 나눠 주지, 뭘 따로 가져가서 하래?"
"넌 데쳐서 쪄 먹는 게 좋다며? 난 장아찌 담글 거야."
"상관없는데. 나도 장아찌로 먹으면 되지."
"가져가서 너 좋은 대로 해 먹어. 엄마도 이제 힘들어."
"어치피 힘든 거 조금 더 하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난 굳이 네 거, 내 거 나누는 엄마가 야속했다. 할 수 없이 깻잎을 집으로 가져오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꼭 만들어주다가 왜 새삼스럽게 따로 가져가라는 건지 엄마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낸 그 후
다음날 엄마와 다시 마주했다. 엄마를 모시고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힘드네." 아닌 게 아니라 엄마 얼굴은 벌써부터 지쳐 보였다.
"왜? 아침에 뭐 했어요?"
"하긴 뭘 해. 5시에 눈이 떠져 영 잠이 안 오길래 일어나서 아침 산책하고, 간장 끓여서 깻잎에 부어 놓고, 나물 삶아 무치고, 빨래도 해서 널고 그랬지."
"그러니까 힘들지. 더운데 아침부터 일 많이 하셨네. 다리도 아프다면서. 근데 벌써 간장을 부었어? 엄만 내 것도 같이 해주라니까. 간장만 부으면 되는데 하는 김에 같이 좀 해 주지… 난 그냥 냉장고에 넣어 놨는데. 간장 끓이고 뭐하고. 아이 귀찮아."
"넌 쪄 먹는다며?"
"아니라니까. 꼭 그렇게 안 해도 된다니까. 내가 언제 꼭 쪄 먹어야 한다고 했어? 해주기 싫으면 그냥 해주기 싫다고 해."
나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허참. 기껏 따다가 씻어까지 줬더니. 고맙다는 말도 못 듣고…"
그리고는 엄마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엄마가 급하게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 울어?"
"눈물이야 노상 나오는데 뭐."
두 눈을 꾹꾹 누르신다.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엄마 진짜 운 거야? 왜?"
"그래. 서러워서 울었다. 요즘 그렇게 슬프다."
또 눈가를 훔친다.
"어어, 엄마 진짜 우는 거야? 엄마~"
"흐흐 울긴 누가 울어."
엄마는 아닌 척하면서 금방 평정심을 찾았지만, 그때 엄마는 분명 눈물을 닦고 있었다.
'서러워서'라는 그 한마디
엄마가 우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내가 커서는 물론이고 어렸을 때에도 엄마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상을 당했을 때에 곡하는 것은 봤어도 '우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이따금 '엄마는 왜 슬플 때도 안 울어? 눈물이 안 나?' 하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울긴 왜 울어?' 했던 엄마다. 그런 엄마가 눈물을 보이신 거다. 나의 어떤 말이 그렇게 엄마를 서글프고 서럽게 했을까. 내가 엄마한테 툴툴거리고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난 자랄 때에도 엄마에게 그렇게 살가운 딸은 아니었다. 짜증도 잘 냈고, 못된 말도 많이 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엄마한테 화풀이를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그냥 가만히 다 들어주기만 했다.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마치 죄인처럼. 그땐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무슨 말을 해도 그냥 다 들어주니 엄마가 제일 만만했었나 보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철이 들었을 때 엄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엄마 예전에 내가 짜증 내고, 소리 지르고 하면 화 안 났어? 왜 그때 아무 말도 안 했어? 혼내 주지도 않고?"
"지도 속상하니까 그랬을 텐데. 거기다 대고 엄마까지 뭐라고 하니? 그러니까 엄마 속이 시커멓게 탔지. 너만 그랬냐? 할머니도 조금만 당신 맘에 안 드시면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시고… 할머니 소리 지르면 가슴이 쿵쿵대고… 으이구 진짜. 그때 생각만하면…"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엄마는 울화병으로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괄괄한 시어머니와 남편, 시누이들, 시동생, 자식들…
"외할머니는 말씀도 조곤조곤하시고 소리 지르는 걸 모르시는 양반인데 네 할머니가 소리 한번 지르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영 진정이 안 되고 그러는 거야."
엄마는 팔십이 넘으셔서 처음으로 당신이 속병을 앓았다고 털어놓으셨다. 그랬다. 모두가 엄마에게 '해 대기만' 했지 누구 하나 엄마의 처지를 알아주거나 엄마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엄마가 울화병이, 속병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엄마는 그냥 성격이 좋구나, 마음이 넓구나, 인내심이 강하구나'라고만 생각했던 거다.
어쩌면 엄마는 젊은 시절 참고 살았던 시간들이 떠올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픈 다리를 해가지고 몇 시간씩 땡볕에 서서 깻잎을 따 와서 씻어까지 주었는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반찬 안 만들어준다고 핀잔만 해대니. 늙어서까지 딸에게 구박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엄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와서 나도 한참 울었다. 이제 내가 엄마 말을 들어줘야 하는데 아직도 엄마 속을 긁어 대고 있다. 지금도 엄마의 '서러워서'라는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려 있다. 엄마 미안해. 이제 내가 엄마 얘기 들어줄게.
[2021.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