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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숲 Jun 21. 2020

세상에 없다. 이토록 송구한 밥상

[팔순의 내엄마] 노모가 차려 준 새해 밥상 



올해도 새해 첫날 엄마는 자식들에게 먹일 밥상을 차렸다. 이 밥상을 차리기 위해 엄마는 며칠 전부터 준비를 했다. 마트에서 한꺼번에 장을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장을 봐 왔다. 하루는 검정색 비닐 봉지에 조기를 사들고 왔고, 하루는 야채거리를 사들고 왔다. 무거운 국거리 고기는 베낭에 짊어지고 왔다. 좋아하는 드라마도 안보고 고깃국물을 우려냈고 냉동실에 얼려 놓은 취나물을 꺼내 해동을 했다. 맨날 팔, 다리, 허리 안 아픈데가 없다면서, 당신 드실 음식은 귀찮다고 겨우 찌게 하나 끓여 드시면서 자식들 입에 들어갈 음식 만들 때에는 기운이 펄펄나시는가보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엄마가 베란다에서 큰 솥단지를 꺼내오길래 “엄마, 묵 쑤실려고?”하고 물으니 “그럼~”하고 대답하는 엄마 목소리는 한껏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


“도토리가루는 어디서 났어??”

“큰 언니가 올 가을에 해 다 준거야.”

“옛날에 엄마가 해 온 건 다 드셨어?”

“그것도 남아 있긴 한데, 너무 오래되서 못먹어.”

“아깝네. 엄마가 힘들여서 해 온건데.” 


큰 솥단지에서 묵이 끓기 시작하자 엄마는 행여 묵이 솥바닥에 눌러붙을까 쉬지 않고 주걱을 젓는다. 근력이 빠져 나간 엄마의 팔은 이제 묵을 젓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예전에 엄마는 가을이면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도토리를 주우러 다녔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엄마는 몸빼바지에 낡은 남방을 걸치고 도시락이 든 커다란 베낭을 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서서 해가 저물어서야 떼꾼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오곤했다. 짊어진 베낭이 터져나갈 듯 도토리 열매를 많이 해 온 날은 “오늘 도토리가 얼마나 많은지 줏어 담기도 힘들더라.” 하며 흐믓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의 베낭에서는 구슬만한 도토리들이 셀 수없을 만큼 쏟아져 나왔다. 반대로 수확(?)이 시원찮은 날에는 ‘에휴, 오늘 간 데는 도토리가 없어. 누가 다 해갔는지… 힘만 들었어.”하며 아쉬워했다. 어떤 날은 다른 사람이 엄마보다 많이 했다며 엄마답지 않게 샘을 내기도 하였다. 


엄마가 주워 온 도토리 열매는 며칠 후에는 어김없이 짙은 갈색의 도토리 묵이 되어 식탁에 올랐다. 엄마는 묵맛을 제대로 알려면 그냥 간장에 찍어 먹는 것이 최고라며 파와 마늘 그리고 참기름을 듬뿍 넣은 양념장과 함께 가지런히 썰은 묵을 내왔다. 아버지는 살짝 간장을 찍어 묵을 맛보시고는 언제나 ‘니 엄마 묵 쑤는 솜씨는 정말 최고야.’라며 감탄하셨다. 내가 봐도 엄마가 만든 묵은 찰랑찰랑하기가 엄마의 뱃살처럼 부드러웠고 갓 연애를 시작한 아가씨 목소리보다 낭창낭창했다. 젓가락으로 들어올리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적당한 끈기가 있어 입 안에 넣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엄마의 도토리 묵은 빛이 투과될 정도로 투명하고 매끄러웠다. 흙탕물이 가라 앉은 듯 혼탁하고 둔탁한 느낌을 주는 묵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엄마표 묵은 명품 중에서도 최고의 ‘명품’이었다. 주변의 누구도 엄마의 묵 쑤는 솜씨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난 지금까지도 엄마의 묵보다 맛난 묵을 먹어보지 못했다. 


도토리가 맛있는 묵이 되어 우리 식탁까지 올라오기까지는 녹녹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만 했는데 그 모든 과정에 엄마의 추가적인 노동이 필요했다. 먼저 딱딱한 도토리 껍질을 벗겨 내야 했는데, 딱딱한 도토리 껍데기를 까느라고 엄마 손은 성할 날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투박하고 뭉툭한 엄마의 손은 손톱까지 망가져 버리기 일쑤였다.  깐 도토리를 물에 불리기 위해 계속 물을 갈아 주느라 분주했다. 불린 열매를 끙끙대고 지고 방앗간에 가서 가루를 내오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빻아온 전분가루를 치대서 물에 담가 가라앉은 앙금을 걸러서 말려주는 일은 소일거리가 아니라 완전 중노동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앓는 소리 한번 없이 가을 내내 도토리가루를 만들었다. 그 가루로 엄마는 동지섯달, 오뉴월이나 상관없이 묵을 쑤었고 집 안의 특별한 날에는 어김없이 묵이 상에 올랐다. 아버지 생신날은 말할 것도 없고, 아들 딸 생일날에도 빠뜨리지 않고 묵을 쑤셨다. 엄마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신상에도 어김없이 묵을 쑤어 올렸다. 


 “엄마 옛날에 도토리 하러 다닐 때 힘들지 않았어?”하고 물으면 

“아니, 얼마나 재밌었는데. 도토리 나올 때 즈음에는 날씨도 좋고, 도토리 줍다가 먹는 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 반찬도 김치 하나뿐이었는데 말야.”하면서 행복한 추억에 잠기곤한다. 


엄마는 도토리와 함께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했다. 한번은 아줌마들과 함께 도토리를 주우러 나간 엄마가 밤 열시가 넘어서 ‘꾀죄죄한 몰골’로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버스를 잘못 타서 반대방향으로 갔다가 겨우 집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엄마는 집과 시장 그리고 늘 다디던 곳만 다녔던터라 버스나 전철을 타고 혼자 어딜 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엄마가 낯선 곳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얼마나 겁이 났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아버지는 ‘다신 도토리 하러 간다고 하기만 해봐’하면서 엄포를 놓으셨지만 그 엄포가 엄마에게 통할리가 없었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어렸을 때에는 엄마가 ‘별맛’도 없는 묵을 만들려고 도토리를 주워 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꾸질꾸질한 복장에 베낭이나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창피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집에 없는 것이 싫어서 도토리 주우러 가지 말라고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이제 내가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고 보니 비로소 엄마가 이해가 된다. 그때 엄마는 도토리 욕심도 있었겠지만, ‘바깥 구경’하는 것이 좋아서 열심히 산으로 들로 다닌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엄마에게는 유일하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던 시간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내와 엄마 노릇 그리고 종가집 맏며느리 노릇까지 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을지도. 


생각해보면 그때는 엄마를 제외한 우리 모두가 제 일로 바빴다. 아버지는 직장생활에, 우리는 학교생활에. 어릴 때 엄마는 집 안의 붙박이 가구처럼 늘 집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집에 엄마가 없으면 화가 났던 것도 그런 이유지 싶다. 그러니 엄마에게도 숨 쉴 구멍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지금도 엄마는 “그때 정말 좋았어…”라며 아련한 추억에 잠긴다. 젊고 생기발랄했던 자신을 떠올리는 것이리라. 이제 팔십이 넘은 엄마에게 도토리하러 갈 수 있냐고 물으면 “이젠 못 가.  다리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가니”하고 만다. 요즘 들어 묵을 보면 슬퍼지는 이유다. 


식구들 모두 노모가 차린 밥상에 둘러 앉았다.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한 새해 첫 밥상에는 어김없이 도토리 묵이 올라왔다. 양념장과 함께. 낭창낭창하고 투명한 엄마 표 묵이.


 “역시 엄마 묵은 최고야.”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팔순 노모가 쑤신 묵을 예찬한다.  그 말에는 '엄마가 최고야'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다. 


[2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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