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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Oct 09. 2015

젊어지는 샘물

외출

요즘 엄마를 보면서 이렇게 된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문득 치매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여행을 가신다면?




1. 외출


아주 긴 꿈을 꾸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희뿌연 창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새벽인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거실이 조용한 걸 보니 모두들 아직 깨지 않고 잠들어 있나 보다.

소리죽여가며 살금살금 집안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큰 딸 집인가 보다. 둘째 아들 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여기로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려면 어떤가? 다음에 정신이 들었을 때는 막내 딸 집에 있을 지도 모 일이다.

방으로 들어와 앉아있다 보니 문득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 자식들도 찾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지금 나는 세상 사람들 잣대로 본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와있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 또 노망난 늙은이가 될지 모르니 꼼짝 못하게 가둘 것이다. 지금 떠나야 한다.


은행 창구 직원이 흘깃거리며 쳐다본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표정이다.  그러나 비밀번호까지 정확하게 누르자 조금 누그러지며 말한다.

"할머니, 이렇게 큰 돈을 찾으시는데 혼자 오셨어요? 저희가 댁에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참, 제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어있죠?"


그러면 그렇지,  이것들이 내번호도 저희들 번호로 변경시켜놓았다.

통장에서 적지 않은 돈이 빠져나간걸 보니 그동안 내 돈을 가지고 맘대로 들 쓴 모양이다.

연락처와 비밀번호까지 바꿔놓고 은행을 나섰다. 가방에 돈도 두둑하고 여행하기에도 좋은 날씨다.

자~ 어디로 갈까?



기차는 가을 들판을 가르며 시원하게 달린다.  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힘찬 기적을 울렸을 것이다.

뽀~옥~!'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애프터 쉐이브 로션 향기가 아련한 추억을 불러온다. 그 사람도 이런 향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가씨, 초콜릿 하나 드시겠어요?"


남자의  눈동자가 선 해 보인다. 그런데 아가씨라니?

아참, 아까 강남 성형외과에서 동안  수술받았을 때 의사가 그랬었지.


"와~  누가 이분을 할머니라고 믿겠어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그냥 아가씨라고 말하셔도 되겠어요 "


그럼 내가 정말 젊은 여자로 변신했단 말인가?  세상 참 좋아졌군. 역시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어.  그나저나 이 남자 어디서 봤더라?


2. 물냉이


엄마가 사라지는 날 통장의 돈도 함께 사라졌다는 걸 안 것은 실종 신고를 한지 열흘이나 지난 후였다.

우리 형제들이 은행에 항의했지만 본인이 와서 돈을 찾아가는데 어쩔 수 없었노라면서 오히려 우리를 쳐다보는 눈빛이 경멸에 가까웠다.


'없어진 어머니보다 없어진 돈이 더 안타깝지?'


엄마가 갈만한 곳은 다 돌아다녔다.  형제들이 나를 원망했지만 나도 할 말이 있다. 엄마를 꾸준히 1년이나 모신 사람은 나다. 하루나 이틀, 길어야 일주일을 함께 있지 못했던 것들이 감히 원망이라니.  내가 길길이 뛰면서 큰소리 치지 않았더라면 계속 원망 어린 잔소리를 들어야 했을 것이다.

모두들 사라진 엄마 걱정에 진이 빠져있을 때 전화가 왔다.


"저 기억하시겠어요?"


변두리 동네에서 약국을 한다는 50대 여자와는 언젠가 통화한 적이 있다.
그때는 여자도 나도 30대 후반이었다.

그 집 아버지와 우리 엄마가 깊은 관계로 교제하시는 것은 용납하겠는데 혼인신고까지 하겠다는 것은 두 집 다 반대했었다. 두 분의 재산은 엇비슷했지만 돌아가셨을 때 재산이 엉뚱한 곳으로 갈까 봐 염려스러웠던 자식들의 마음도 비슷했나 보다. 그때 두 분의 나이는 60대 후반이었다.
여자의 아버지는 강원도 영월로 들어가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다가 지금은 기운이 달려 혼자 근근이 지냈는데 최근 홀연히 사라지셨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어느 고운 할머니 한분이 와서 같이 지냈다고 들었는데  혹시나 싶어 우리에게 연락을 한 것이라고.


"이 샐러드에 들어있는 이게 뭐예요?"


엄마를 찾아다니다가 들어간 강원도 산골의 어느 허름한 식당의 샐러드의 맛은 오묘했다. 쌉싸름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허기지던 차에 식욕을 더해주었다.


"물냉이예요. 저기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샘이 하나 있어요. 거기에서 나온 거랍니다. 도시에서는 맛보기 힘들 거예요."

"날이 제법 쌀쌀해졌는데 요즘도 있어요? "
"거기는 항상 샘이 솟는 곳이라 겨울에도 얼지 않아요. 물 속으로 손을 넣어보면 이런 물냉이들을 건져 올릴 수 있죠.  게다가..."


물냉이가 지천이라는 그 샘물에는 예로부터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단다. 우리나라 구전설화에도 있는 젊어지는 샘물이라고. 옛날 어느 착한 노부부가 산신령의 도움을 받아 젊은 부부가 되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민간설화 말이다.

"그건 그렇고, 혹시 최근에 낯선 할머니와 할아버지 못 보셨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라... 글쎄요, 최근 들어 우리 마을에 들어온 사람이라곤...

아-! 있긴 한데 그분들은 노인들이 아니에요. "


"노인은 무슨, 아무래도 거 뭐냐... 바람 난 사람들 같아. 요새 말하는 불륜 커플, 40대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무슨 신혼부부처럼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니까."

마른 장작을 난로에 던져 넣던 주인 남자가 거들었다. 산골의 가을은 난로에 불이 활활 타고 있어선지 을씨년스럽지 않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있다는 전설의 샘물도 볼 겸 불륜 커플이 사는 집 앞을 지나갔다. 담 너머로 식당 주인 남자 말처럼 불륜 커플의 애정행태가 눈에 들어왔다. 40대 중년 남자와 중년 여자가 가을 햇볕 따스한 마루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누워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서로 마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마당에 널려있는 붉은 고추만큼이나 농염하고 호박 가지를 썰어 널어놓은 갈무리들처럼 여유로워 보였고, 세상에는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는 듯 주변을 둘러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구전설화 속 노부부가 샘물을 마시고 젊은 부부가 되어 행복하게 늙어가는 중인 것 같았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지만 샘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산을 내려와 식당 주인에게 다시 물어보려 했지만 이번엔 식당도 어디 있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불륜커플이 사는 집도 보질 못했다.  


"반대쪽 산에서 넘어오셨나 보네요. 산골의 해는 빨리 지는데 용케 잘 내려오셨군요. 그런데 그쪽 동네는 사람이 살지 않은지 꽤 오래된 곳인데 뭘 보셨다는 건지. 샘물은 또 뭔지. "


간신히 만난 약초꾼의 말도 믿어야 되는 건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딘지 스마트폰을 켰지만 여전히 불통이다. 산골의 차가운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왔다. 아까 보고 느끼었던 따스하고 여유로운 가을 풍경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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