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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bysparks Nov 17. 2019

orange juice please

[오렌지 쥬스 플리즈]: 오렌지 주스 주세요,  설레는 여행의 문장 

스물 세살 때 처음 혼자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엄마와 아빠를 뒤로 하고, 비행기 좌석에 앉아 아빠가 몰래 손에 쥐어 준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있는 두 칸 짜리 좌석의 복도 쪽에 앉아 있었고, 옆자리에는 내 몸의 딱 두배 만한 엄청나게 커다란 몸집의 미국인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의 몸 일부는 이미 내 좌석의 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나는 최대한 몸을 움추린 채로 울었다. 비행이라는 게 이렇게 좌석을 나눠쓰고 그런 건가보다 생각하면서.

내가 탄 비행기는 델타항공이었는데 육중한 비행기가 이륙하자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고 금발의 승무원이 카트를 밀고 다가왔다. 그녀가 내 자리로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두근 거렸다.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뭘 시켜야 하나, 저 카트 안에는 오렌지 주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긴장하고 고민하다 보니 남아있던 작은 슬픔조차 사라졌던 것 같다. 고민 끝에 나는 내가 아는 유일한 음료인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오렌지 주스를 받아들고 마시려는데 옆 자리 거구의 아저씨가 살짝 몸을 움직이는 순간,  아저씨 손에 들린 오렌지 주스가 미끌어지더니 컵과 함께 한 방울도 남김없이 내 옷에 몽땅 쏟아져내렸다.  얼굴은 눈물범벅 몸은 주스범벅. 나와 기내의 오렌지 주스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순간은 카트를 밀고 온 승무원에게 "Would you like to have something to drink?"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아닌가 싶다. '주스를 마실까, 하이네켄을 한 잔 할까, 주스랑 맥주를 둘 다 달라고 해도 되나' 이런 행복한 고민을 하다보면 비로서 내가 떠나왔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계획에도 없던 승무원이 되었고, 카트 속에 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알게되었다. 그 안에는 오렌지 주스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주스뿐만 아니라 맥주, 위스키, 럼, 보드카, 레드와인, 화이트 와인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구나 내가 일했던 에미레이트 항공은 모든 항공사를 통틀어 가장 다채로운 식음료 메뉴를 자랑했다. 이코노미 클래스에서도 간단한 칵테일 정도는 누구나 마실 수 있다.  카트의 베일이 벗겨낸 뒤 그동안 오렌지 주스 아니면 물이나 시켰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신비롭게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렌지 주스를 시킨다. 영어를 잘해도 못해도, 카트 안에 그것 말고도 많은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여행 베테랑도 비행기를 처음 탄 본 사람도 모두 오렌지 주스를 달라고 했다. 스카치테이프나 대일밴드 같은 그런 건가. 주스라고 하면 오렌지가 붙어야 뭔가 착 달라붙는 기분?

물론 몇몇 예외적인 나라가 있다. 인도 비행은 망고 주스가 대세였다. 망고 주스는 물기가 적고 걸죽해서 다른 주스와 달리 빨리 나오지도 않는데 하도 망고 주스를 달라고 해서 망고 주스를 찾는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파인애플 주스를 자주 찾고, 유럽이나 러시아를 갈 땐 토마토 주스 마니아들이 섞여 있다. 토마토 주스에 보드카(와 소금, 후추가루, 핫소스, 우스터소스)를 넣어 만드는 칵테일 블러디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을 빼고 소금과 후추가루만 넣어서 찾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레시피의 이름들에서 오는 거부감과 달리 먹어보면 정말 맛있다. 


그럼에도 승무원의 질문에 자동적으로 나오는 오렌지 주스의 신비함은 여전하다. 아마도 "오렌지 주스 플리즈" 만큼 예쁜 소리가 없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갑자기 여행이 떠나고 싶어진다. 좋은 풍경, 좋은 추억, 좋은 사람 이런 것들 모두 제쳐두고라도

Would you like to have something to drink?

설레는 그 말이 듣고 싶어서.  

오렌지 쥬스 플리즈라고 나도, 말하고 싶어서.



tip. 기내 음료 주문 시 시킬 수 있는 것(일반 항공사의 이코노미석 기준)

물water, 콜라Coke, 스프라이트Sprite, 진저에일ginger ale, 닥터페퍼Dr.pepper 오렌지주스orange juice, 애플주스apple juice, 망고주스mango juice, 파인애플주스pineapple juice, 토마토주스tomato juice, 맥주beer(맥주 종류는 항공사에 따라 다르니 물어보세요what kind of beer do you have?), 보드카vodka, 위스키whisky, 럼rum, 레드와인red wine, 화이트와인white wine(*와인은 항공사 서비스에 따라 식사 시에만 제공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땐 밥을 줄 때 다시 달라고 하세요), 리큐르liqueur(리큐르는 독특한 향이 많이 나는 술 종류로 식전이나 식후에 소량을 마셔요 예를 들면 베르무트vermouth, 캄파리campari 등), 간단한 칵테일(잭콕Jack Daniel's+Coke, 진토닉Gin+Tonic water, 블러디메리Vodka+tomato juice 등)


(주류와 주스의 종류는 항공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해외 항공사를 타면 국내 항공에는 없는 주류와 주스 종류도 많으니 승무원에게 물어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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