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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bysparks Nov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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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티프리]: 쇼핑을 위한 꽤 좋은 핑계, 담배셔틀


아빠는 자주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여행을 간다고 하면 어디로 가는지, 누구랑 가는지, 언제 오는지 이런 시시한 질문 대신에 그저 공항에 가면 잊지 말고 담배를 사다 달라고. 얇고 기다란 에쎄 중에서도 ICE라고 적힌 초록색 포장인데, 일반 파랑과는 다르니까 헷갈리지 않게 주의하라며. 친구와 같이 간다면 두 보루를 부탁한다고 당부하셨다.   

    

원칙적으로 면세점에서 파는 모든 물건이 공항 바깥보다 저렴하다지만, 담배만 한 게 있을까. 덕분에 면세점에서 담배를 사는 줄은 늘 가장 길다. 언제나 긴 줄을 서느라 면세점에서 다른 곳을 볼 시간은 넉넉지 않았던 것 같다. 나도 담배를 폈다면 여행을 갈 때마다 신나게 줄을 섰겠지만, 그래서 아빠와 내 담배 사이에서 뭘 사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수도 있지만, 다행히 난 담배 대신 술을 좋아한다.      


보통 여자에 비해 담배셔틀을 빼면 딱히 기억에 남는 추억은 없지만, 면세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마지막 비행으로 말레이시아 쿠알룸푸르에 갈 때였다. 그때 기내 면세를 맡았다. 기내에서 면세를 담당하는 승무원은 파는 물건만큼 커미션을 챙길 수 있는데, '장사'를 잘 하는 크루들은 한 번 비행으로 적지 않은 용돈을 벌기도 했다.  기내에서 물건을 사본 적이 없는 사람은 생소하겠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기내 면세를 이용한다. 환전해간 돈이 애매하게 남았거나, 시간이 없어서 여자 친구 선물을 못 샀거나, 기내에서 아무거나 한번 사보고 싶거나, 아니면 너무나 너무나 심심하거나.       


사무장은 피부가 눈처럼 하얀 시리아 사람이었다. 그는 게이였는데, 그간 봐온  게이 중에서도 친절하고, 일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모두에게 상냥했던 그는 비행 내내 유독 나에게만 차가웠다. 마지막 비행이라는데 놀라워하지도, 말을 걸어오지도 않고 시종일관 싸늘했다.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매 순간이 서글펐고, 쿠알라룸푸르에서 친구를 만나 마지막 비행을 기념했다.     

   

돌아오는 비행은 한산했다. 밤 비행이라 승객들 대부분 잠이 들었고, 어느 순간 갤리 안에 그와 나 둘만 남았다. 어색한 침묵 끝에 그가 내게 처음 내뱉은 말은 '한국에 돌아가면 죽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잘못 들은 것 같아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가장 친했던 승무원 동료가 한국에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돌아간 삶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말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던 것 같다고. 일을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간다는 나를 만나서, 내내 그 친구가 떠올랐다고.      


걱정 어린 그의 표정을 보자 문득 마지막이라는 것이, 이제 다시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두바이에 도착하던 날 한국에 돌아갈 계획을 세운 나였지만, 그만두는 결정을 하는 건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이십대도 후반에 접어들고 있었고, 뭔가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건 분명히 무섭고, 겁이 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다(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돌아가서도 지금처럼 열심히 살겠다고.  


이륙하기 전 그는 내게 여동생 생일 선물로 살 향수 하나를 골라 달라고 했다. 마지막 비행에서 귀찮게 기내 면세를 맡은 나를 위해 공항 면세점이 아닌 비행기에서 사는 거라고 덧붙이면서. (나는 그 비행 내내 면세품을 한 개도 팔지 못했다.)      


두바이에 도착해 크루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매번 처음 보는 크루들과 일을 하다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의무적이라고 느껴질 때도 많았지만, 이제 고국으로 영영 돌아간다는 나를 위해 다들 진심 어린 인사를 해주었다.


잠시 후, 크루들 사이에서 멀찌감치 서 있던 사무장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러 다가왔다. 그는 가방에서 좀 전에 내게서 사갔던 향수를 건네주었다. 내 마지막 비행과 새 인생을 위한 선물이라며.      


잘 놀라거나 울지 않는데, 그땐 놀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설탕을 한 포대 통째로 넣은 듯한 (너무나) 달달한 향의 지방시 향수였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젠 잘 쓰지 않지만, 버리지 않고 있다. 먼지 쌓인 그 향수병 안에 내 마지막 비행과 그와의 추억이 아직 있다.       


그 뒤로 비행기를 타면 아주 가끔 향수를 산다. 아빠의 담배 심부름 때문에 공항 면세점을 둘러보지 못해서일 때도 있지만, 아마 그  고맙고, 좋은 기억 때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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