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니 플레닛]: 가이드북의 클래식
몇 년 전, 가이드북을 한 권 썼다. 겁도 없이 멋모르고, 맨땅에 정말 헤딩하는 듯한 기분으로. 책은 잘 팔리지 않았지만 후회는 없다. 한 나라를 그토록 자세히 들여볼 수 있었던 경험과 그곳에서 일상을 살았던 추억이, 그리고 여행이 뭘까에 대한 진지했던 고민이 피와 살이 되어 남았으니까.
여행을 많이 했지만, 그전까지 여행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기본적으로 누구에게 뭘 가르치는 걸 즐겨하지 않았다. 어디가 좋은지, 무엇이 맛있는지, 뭘 하면 좋을지 묻는 질문에 답하는 건 늘 곤혹스러웠다. 당신과 내가 다른데, 내 여행이 좋은 답이 될 수 있을까 싶은 쓸데없는 생각이 많았다.
취재를 떠나기 전, 출판사 사장님과도 그 부분에 대해 얘기 나눈 적이 있다. '되도록 객관적으로 쓰라'는 사장님과 '사람이 어떻게 객관적이 되냐'는 작가의 사소한 마찰 같은 것이었다. 어차피 이 책을 드는 사는 사람은 내 여행에 동참하겠다는 동의라는 게 내 이상한 주장이었다.
그래서 가이드북을 쓰는 건 쓰는 과정보다는 그 마음가짐 때문에 어려웠다. 어떤 곳을 어떻게 설명하고 보여줘야 할지. 여행의 기술이란 게 과연 있는 건지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가이드북을 쓰기 전이나 후나 여행을 떠나기 전엔 언제나 가이드북을 샀다. 사람들은 곧 가이드북이 사라질 거라고 했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그럴 줄 알았다). 블로그의 정보들은 너무나 방대하게 흩어져 있고, 믿을 만한 정보를 찾는 건 여전히 귀찮고 어려운 일이다. 또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겐 인터넷이라는 우주 속을 먼지처럼 떠다니는 자료보다 작은 책 속에 들어있는 압축된 정보가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가이드북이란 건 여행의 관례 내지는 습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수학의 정석>처럼, 가이드북 역시 설레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사서는 그 도시의 기후와 사계절 주요 축제 그리고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법까지만 줄을 치면서 읽다가 그 뒤부터는 열어보지 않는 게 다반사니까. 그렇지만 서울대를 가든 지방대를 가든 누구나 대학을 가려면 어찌 됐던 정석을 사서 집합까지는 봤던 것처럼 가이드북이 또 그런 거다. 여행에 대한 예의랄까 일말의 책임감이랄까.
몇 년 전 론니 플레닛의 창립자 토니 부부가 쓴 에세이를 읽었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었던 두 부부는 얼떨결에 가이드북(같은 책)을 만들었고, 그렇게 그들의 책은 시간이 지나면서 클래식이 되었다. 읽는 내내 마치 그들과 함께 여행하듯 고단하기도, 가슴이 뛰기도 했다. 가이드북을 만들어온 과정보다도 이들 삶 자체가 내게 좋은 영감이 되었던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자유롭고 일상적인 여행을, 사적이고 소소한 여행을 '선호한다고 말하기'를 '선호'한다. 그렇다면 가이드북 역시 굳이 '최신의', '가장 핫한' 곳을 엄선하는 책이 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기본이 되는 정보만 알면,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마음껏, 사적으로 여행하면 될 테니까. 먼저 다녀온 그 사람이 좋았다던 그곳을 나도 한 번 가보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론니플래닛의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정석은 방정식 이후로는 제대로 본 적 없는 그런 책이 될는지 모르지만 고등교육을 시작한다는 것, 입시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에 그 책은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가이드북이 그렇다. 여행을 시작하는 데 있어 그 도시의 책을 산다는 건 그 여행에 진지하게 임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여전히 꽤 많은 여행자의 가방 속에 무겁고, 촌스러운 책 한 권이 들어가 있는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