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뭐가 씌었을까?

돌다리도 두들겨가라

by 루달

고모가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나는 20대 때 출발은 늘 가볍게 사고를 쳤지만
문제는 끝이 한 번도 가볍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중 하나가 스물일곱여름.
이젠 살이 좀 빠졌다고 못 가 봤던 나이트를
친구와 둘이 접수하기로 했다.


싸이의 '새'와 컨츄리 꼬꼬 음악이 스테이지에 흘렀다.
그러다 웨이터 한 명이 다가와 내 친구가 부른다며
룸 쪽으로 데려갔다.


가 보니 친구는 태진아 리즈 시절 느낌의 남자 옆에
이미 찰싹 붙어 앉아 있었다.


“어서 와!! 제 친구 루달이에요.
어서 거기 앉아!”
친구가 턱으로 가리킨 자리엔
혼자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나는 나이트가 처음인 티를 안 내려고
이 구역 죽순이의 사촌쯤 되는 얼굴을 쳐들고
슬쩍 자리를 차지했다.


내 옆의 남자는 몽골 모자를 쓰고
명상가 풍의 옷을 위아래로 맞춰 입고 있었다.
착장이 약간 도 닦다 잠깐 클럽 들른 사람 같았다.
특별을 넘어 특이하게 감지 됐다.
얼굴은 피부 좋은 신하균 계열이었다.


내가 누굴 닮았다고 자주 쓰는 건
사람 얼굴이 카메라로 찍어 둔 것처럼 기억되기에.


우리는 한 시간쯤 춤추고 놀다가
근처 포장마차로 2차를 갔다.
친구 옆 태진아 닮은 남자는 자영업자였고
반면 내 옆 남자는 자신을 '여행가'라고 소개했다.
라이프스타일을 들은 기분이었다. 백수일 수도...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은 또 너무 말끔했다.
대화는 청산유수요, 표정은 도화살이 뿜어 나오고
말투는 세속과 산속을 둘 다 찍고 온 사람 같았다.
거기다 바디숍 화이트 머스크 로션 향까지 났다.

곰장어와 닭똥집을 앞에 두고
네 명이 소주를 8병을 마셨는데 모두 멀쩡했다.


자정이 넘어 나는 친구와 헤어지고
그 남자와 둘이 남았고,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아빠와 목마 타던 공간처럼 왜 그렇게 편했는지.

난 거부를 못했다.

한 대 걸러 나온 내 멍청이 유전자가
조용히 시동을 걸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남자는 집 앞에서 내 전화번호를 물었다.
나는 잠깐 머뭇하는 척만 했지
사실상 이미 마음속 문을 반쯤 열어 둔 상태였다.
번호를 받아 적은 남자는


“오늘 즐거웠어요, 루달 씨.
오늘은 우주에서… 별들이 축복해 주는 날 같아요.

지금 이 떨림은 감정이 아니라 주파수예요.”


아 나는 잠깐 송과선 부근이 찌릿했다.

촌스러운지 느끼한지 판단도 전에
얼굴부터 먼저 우주 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팔 엔 염주까지 찬 남자가
집 앞에서 별의 축복을 말하고 있지만

복장은 산속이요
멘트는 은하수였다.


그리곤 점점 다가와 내 머리카락 한쪽을
슬로모션 광고 찍듯 넘겨줬다.


솔직히 막을 수는 있었다. 손만 뻗으면 됐다.
그런데 그날은 정신과 육체가 서로 협업을 안 했다.
머릿속 경보음은 울리고 있었는데
몸은 이상하게 고객센터 점검 시간처럼 멈춰 있었다.


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어서 들어가요. 물 꼭 마시고 호흡으로 감사하다고...”

이게 작업인지, 철학인지, 최면인지 안갯속이었다.



집에 들어와서는 베개를 끌어안고

이불킥을 반복했다. 먼지 나도록 뒹굴었다.
음.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신비감이었다.


그의 혓바닥 위에 팔만대장경을 펼치듯
심오한 말들이 드론쇼하며 떠올랐다.

이상한 바이러스에 잠식된 사람처럼
혼자 떨리는 감정을 주체 못 해 밤을 설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전화가 나를 깨웠다.


“루달 씨, 일어났어요?
아침에 차 한 잔이 하루를 일으켜요.
어떤 차 좋아하세요?”


외제차? 시원한 냉수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약간 닭살이 돋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남자의 말투가
조금씩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독은 늘 이상한 방식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싱잉볼이 진동하듯 전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며칠 뒤, 보고 싶다며 집 앞에 찾아왔다.
큰 액자 하나를 들고 왔고,
얼마 전 네팔에 다녀왔다며

차와 무지갯빛 벙거지모자까지 건넸다.


선물의 결도 심상치 않았지만
더 수상한 건 그다음 말이었다.
액자가 무거우니까 우리 집에 들어가자고 했다.


그때 지하 월세방 하나에 살고 있었다.
누추해서 잠깐 머뭇거렸지만
그는 그걸 눈치채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젊을 때는 이런 고생도 사서 하는 거예요.”


말은 위로였는데 입장은 이미 완료 상태였다.



큰 액자를 못에 거는 건 촌스럽다며
벽 옆에 기대 세웠다.
망치질이 싫어서였는지, 못하는지 조금 수상했다.


그는 곧 주방으로 가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리고 차를 가져왔지만,
주전자와 컵을 너무 잘 찾는다는 게 의아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보더니 말했다.

“루달 씨, 어휴 반찬들이 전부 삶의 의욕을 잃었네요.
잠깐 시장 가서 살아 있는 애들로 데려올게요!"

잠시 뒤 그는
생고등어와 김치를 사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야무진 솜씨로 김치찜을 해줬다.
맛은? 경계심을 밥숟갈로 퍼먹게 만드는 맛!
한 대 쳐도 계속 맞으면서 먹을 맛이었다.

이 남자 손끝에 마술을 부렸을까? 손맛이 끝장이었다.


먹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밖은 이미 깜깜했다.
얘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내가 무슨 말만 꺼내면
그는 꼭 우주 정거장 경유 말투로 받았다.


“그 마음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요?”
“그 말은 이미 무의식의 소리예요.”

"루달 씨는 차크라 7번이 활성화 됐어요"


도올 선생도 도망갈 코스모스 대환장이었다.


점점 조만간 사고 친다 싶은 분위기가 됐다.
아니다 다를까 그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내 손을 자연스레 잡았다.


앗. 근데 손이… 이상했다.
여태 한 번도 못 느껴 본 촉감이었다.
손바닥에 지문이 없는 사람처럼 보들보들.
나 왜 이러지. 이 짜릿함이 손르가즘인가?


그때!!!!


'광쾅쾅 쾅쾅!!'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현관문은 폭파 직전이었다.
문밖에서 세상 제일 현실적인 목소리가 터졌다.


“루달아!! 문 열어!!
얼른!! 미역국 끓여 왔어!!”
나는 그대로 굳었다.


그 앙칼진 목소리는
막내고모 여시의 것이었다.


난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 순간 자동으로
쉬잇?쉿!!!”
누가 보면 장물 숨기다 들킨 사람 같았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척해 보려 했지만
지하 월세방 안에
성인 남녀 둘이 앉아 있는 공기는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문밖엔
우리 집안 최고 촉을 가진 막내고모 여시가 있다.


긴장감이 맴도는데

금방 밖이 잠잠해졌다.

문밖이 조용해졌고 안도감으로 근육이 풀렸다.
둘 다 얼굴은 계란국처럼 퍼졌고

휴... 한숨을 뿌렸다.


방 안은 덥고 얘기는 길고 정신은 느슨해졌다.
그 남자는 더웠는지 남방을 벗고 나시만 입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드르륵—!!


내 방 창문이 예의도 없이 옆으로 밀리더니
막내고모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야!! 뭐 해! 당장 문 열어!!”


드르륵 열린 창문 사이로 들이민 막내고모 얼굴은
거의 영화 스크린을 뚫고 튀어나온 것 같았다.



아뿔싸 진짜. 징글징글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한숨부터 한 번 크게 쉬었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가 현관문을 열어 줬다.


고모는 씩씩 거렸고 안경은 호흡으로 뿌예진 채


“야!! 내일 너 생일이라
미역국 끓여 왔어!
근데 누.. 누구세요?”


남자는 허둥지둥 남방부터 주워 입었다.


“저... 저는 루달이 친구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고모 콧구멍이 미세하게 커졌다.
그리고 사람 스캔하듯 남자를 위아래로 훑으며


“몇 살이세요?”
“서른일곱입니다.”
“헉. 저랑 동갑이네요? 결혼은요?”


아차. 내가 그걸 안 물어봤구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세상엔 중요하지 않은 척했다가
나중에 목을 조르는 질문들이 있다는 거였다.


남자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저… 결혼했습니다.”
“네?? 유부남인데 왜 처녀 집에 있어요!!!”
호통이 떨어지자
남자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아이 둘 있고…”


막내고모 얼굴이 순식간에

사탄아 물러가라!식의 분노로 소리쳤다.


"나가세요!!"
다시는 연락하지 마시고요!!”


“네,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고모는 엄마 이상으로 나에게 다그쳤다.


“아이고, 이 멍청아!!
너 저 남자랑 어디까지 갔어?
아니다, 일단 너도 몰랐던 거지?”


“응… 엉엉엉.”


“울지 마!! 뭐 저런 남자 때문에 울어!
남자들은 다 늑대야!! 무조건 먼저 나한테 보여줘!!”


그 후 유부남 남자는 마지막 전화가 왔다.


"미안해. 그리고 나한테 미련 있는 거 아니지?

못 믿겠으면 우리 가족사진 보여줄 수도 있어.

나 잊고 잘 살아!"

뚝--끊었다. 도끼병인지 왕자병인지.


그 후 일주일간
다시는 남자 근처도 가지 말자 다짐했다.
하지만 노처녀가 마음먹은 대로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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