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에 성공한 직후였다.
거울을 보면
어찌나 갓 튀어나온 아기상어 같던지 촐랑촐랑.
멋 부리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와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건너편 테이블 남자가 느닷없이 꽃다발을 들고 와
내 앞에 내밀기도 했다.
진가는 동창회에서 발휘됐다.
나를 '홍금보'라 부르던 녀석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되물었다.
“네가… 루달이었어?”
그날 이후, 내 옆자리는 늘 치열한 경쟁의 장이 되었다.
하루는 동창 녀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저... 잠깐만 나와볼래"
후줄근한 차림에 코를 후비며 서 있는 나를 보며,
녀석은 무균상태로 정신을 못 차렸다.
편의점에 들러 생필품을 잔뜩 사 오더니,
내 손에 쥐여주며 보육원 원장님이 된 듯 미소를 지었다.
“루달아 건강 잘 챙기고 잘 먹어야 해!”
수줍음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바람처럼 멀어졌다.
공주병에 휘감긴 채, 한 계절을 넘기고 있었다.
화상채팅이 유행이었다.
물들어 올 때 노 저으라고
방구석에서 캠을 달고, 더 예쁜 척,
기가 막힌 각도를 혼자 학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인테리어를 한다는
세 살 연상의 남자를 알게 됐다.
배용준을 닮았고, 매너도 좋았다.
음악 선곡이 좋았고 목소리도 올리브처럼 미끄러졌다.
화상채팅방에서
나를 고현정 닮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턱살이 남아 있는 저현정...
각도를 꽤나 공들여 내리찍은 거였다.
매너 좋은 그 남자와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모임으로 이어졌다.
그는 나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때까지도 맞선 외엔 연애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모임에 나갈 때면
주일학교 같이 다니던 동네언니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남자에게 선을 그었다.
떨리는 감정이 생기지 않아서 방어벽을 세운 것.
그런데
그는 동네 언니와 계속 연락하고 지내오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겨울이 깊어가던 12월 중순즈음.
동네언니가 찾아와 숨을 헐떡거리며
“잔말 말고 일단 옷 입어! 빨리 너 나가야 해!”
그 남자가 간절히 부탁했다는 거였다.
나를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동서울터미널 근처로 떠밀듯이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 남자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대구행 티켓을 이미 끊어놓고 들이밀었다.
내가 멈칫하자마자 가방에서
돌돌 말아있는 신문지를 꺼냈다.
내 쪽으로 밀어붙였다.
난 얼어붙었고 그 신문지 안에 흉기라고 느꼈다.
“일단 니는 내 따라와라. 우리 집 내려가가
부모님께 인사하자!”
오줌이 지릴 뻔했다.
“아… 알았어. 대신 화장실 좀.”
그는 나를 따라오면서
“잠깐, 휴대폰 이리 내놔라.”
몰래 전화하려던 참이었다.
그는 내 앞에서 전원을 껐고 그대로 휴지통에 던졌다.
심장에 이끼가 번지듯 우후죽순 뛰기 시작했다.
이성적 스위치는 멈췄고 마네킹이 돼 따라갔다.
고속버스 맨 뒤, 창가 안쪽에 앉았다.
밖만 봤다. 이대로 내 인생이 끝장나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짝사랑하던
손등에 국도 깔아놓은 체대 오빠에게
데쉬라도 할걸.
이제 물올랐는데 강제 시집이라니'
그는 코트를 벗어
내 위에 덮어줬다.
매너 좋은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강제로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구에 도착했을 때 밤 열두 시쯤.
도시는 거의 꺼져 있었다.
그는 여관을 잡았다.
“오늘은 늦었으니 눈 좀 붙이고 아침에 가자.”
나는 침대에,
그는 바닥에 누웠다.
자는 척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마치 천장에 심장이 닿는 듯 뛰었다.
'하나님 예수님 잘못했습니다. 반주자가 돼가지고
술도 마시고 싸돌아 다니고.. 살려주십시오'
갑자기 살 좀 빠졌다고 나대고 다닌 나를 후회했다.
그때!!
남자의 코 고는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탈출계획뿐이었다. 걸리면 죽고 살아도 죽은 것,
똑같을 뿐이라 단정했다.
침대 끝으로 근육들을 통제하며
발끝부터 내렸다.
한 발,
또 한 발.
옷걸이의 옷을 번개처럼 잡았다.
발을 신발에 끼여놓는 동시에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한 번에 열렸다.
비상구 불빛이 보였고 복도를 미친 듯이 뛰었다.
여관 정문을 밀치고
대로변으로 나갔다.
멀리서 택시가 보였다.
손을 휘저으며 달렸다. 살려고 달렸다.
차는 내 앞에 멈췄고, 문을 열고 몸을 던졌다.
“아저씨, 아저씨! 당장 서울 가주세요!!”
나는 현금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20만 원 정도를 들고 다녔다.
택시비는 딱 됐다.
현기증과 맥박 소리가 뒤엉킨 채 정신을 세우려
몸부림쳤다.
그 새벽에 전화할 곳이 없었지만
전화번호 하나가 강하게 꽂혔다.
친구가 소개해준 IT 4살 연상 개띠 남자!
두 번 만나고 전화로 친해지는 중이었다.
택시 안에 시계는 4시쯤이었다.
나는 기사님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그는 받았다. 그리고 울먹였고 진심이 전해졌다.
“괜찮아요? 지금 고속도로 CCTV상황 지켜볼 거니까
일단 만남의 광장에 내려달라고 해요."
그 한마디가
뭉쳤던 긴장들을 풀어줬다.
그는 차를 가지고 나와 있었다.
서울 입구 만남의 광장이 보였다.
우리둘은 스킨십 하는 사이도 아닌데,
보자마자 뜨겁게 안아버렸다.
곧 2탄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