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남정네
처음이었다. 아빠 외에 남자와 포옹하는 건.
큰 곰인형 하나와 내가 포갠 감촉이었다.
그 IT 남자는 내 등을 여유 있는 박자로
토닥, 토닥.
안았다가 떨어질 때도 어색함이 없었다.
난 피부묘기증에
콜린성 알레르기까지 있었지만,
민감한 피부 세포는 그의 체온을 거부하지 않았다.
남자의 팔은 내 팔을 놓지 않은 채 날 훑어봤다.
눈가에는 짠 국물이 맺혔고 얼굴은 붉게 상기돼 있었다.
“루달 씨, 이제 안심해요. 참! 배 안 고파요?”
그의 심장에서 토하듯 나온 말이 무장해제시켰다.
“저 뼈다귀탕 먹고 싶어요!”
말하고 나서도 아차 싶었다.
그와 두 번 만나는 동안
열심히 깔아 둔 내숭들이
감자탕 뼈다귀 앞에서는
너무 따로 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곤 내 팔을 살포시 감싸고
차문을 열어 옆자리에 태웠다.
나는 아빠의 교통사고 이후
앞자리 울렁증이 있어서
손잡이에 거의 매달린 채
24시간 뼈해장국집으로 찾아 달렸다.
차 안에서조차 납치 사건의 식은땀이 남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낯선 공간에 문득
'지금 이 남자는 왜 나를 보호하는 거지?'
지난 첫 만남부터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친구가 내 사진 한 장에,
일명 뻑갔다며 꼭 소개해달라고 전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잘생김이나 키가 아니었다.
적당한 키에 넥타이.
도시남자처럼 무스를 발라 숱 많게 넘긴 머리.
얼굴은 잘 정돈돼 있었고,
몸은 비만과 보통 사이 어딘가,
푸석 살 같은 느낌이었다.
인상은 순둥순둥했다.
눈빛은 살기가 아니라
성실함으로 살아 있어서 일단 통과였다.
패션칼라도 튀지 않고 좋았다.
블랙과 화이트 사이에서 무난하게 선을 지키는 쪽.
대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슬쩍 비치는 바로 딴 복숭아빛이 보였고,
부산 사투리를 자제하려 해도
툭 튀어나오는 모습은 인간미 자체였다.
질문도 사람 에너지를 빨아먹을 만큼 깊지 않았고,
묘하게 1차원적이면서도
잘 들어주는 태도가 모범생 같아서 호감이 갔다.
밥을 먹을 때도
우악스럽게 밀거나 쩝쩝거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깔짝거리지도 않았다.
소화하는데 방해되지 않아 좋아 보였다.
쭉 초벌구이식으로 스캔해도 걸릴 만한 건 없었다.
물론 메뉴는 닭볶음탕, 순댓국, 족발이 당겼지만
"스파~~ 게티요" 고상한 척, 난 늘 뻥쳤다.
그는 나를 소개해준 친구에게
결혼까지 하게 되면 옷 한 벌 사주겠다며
마음에 든다고 기뻐했다.
그런데 두 번째 만남에서
어랏, 양복이 아니었다. 캐주얼이었다.
힙합 전사라도 될 것 같은 큰 청바지에,
필기체 영어가 적힌 껌 냄새 날 듯한
프레시민트 계열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오— 깔쌈한데? 새롭네.'
수입맥주바에서 만났는데
술 한 잔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토끼눈이 됐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 이상형은
아예 잘 마시거나,
아예 못 마시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둘 다 웃음이 많은 성격이라
화기애애한 채로 2차는 노래방에 갔다.
그 수줍은 모범생의 반전은 거기서 시작됐다.
이기찬의 〈비바 내 사랑〉을 불러 젖히는데,
그건 한두 번 연습해서 나오는 춤사위가 아니었다.
차차차 리듬 전주에
내 엄지발가락부터 꼬물대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는 음과 박자는 정확한데
뭔가 삑사리가 얼굴을 내밀 듯 말 듯했다.
중요한 건
가사를 거의 내 몸으로 총 쏘듯 불렀다는 거다.
춤은 또 왜 그렇게
개그맨 강성범 제스처와 새타령 민요 춤사위를 섞으며
양손으로 공중을 휘젓는지.
눈 뜨면 보고 싶고
만나면 안고 싶은
사람이 생겨버렸어
다신 두 번 다시
마음 다칠 사랑
안 하려고 했는데
내 사랑
내 하루를 다 가진 너인데
왜 너의 맘은
내게 줄 듯 말 듯
오 왜 나를 애태우나
책임져야 해
내 눈을 바라보며 부르는 그 가사내용이
뭔가 애매하게
책임감을 던지듯 했다.
저 비바 내 사랑 한 곡이
나를 무의식 중에 세뇌시킬 줄은 몰랐다.
깜깜한 고속도로 망망대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 남정네뿐!
그 노래가 나를 만남의 광장의 뜨거운 포옹과
뼈다귀탕까지 끌고 갈 줄은...
곧 만남의 광장 근처에서 식당을 찾았고
허겁지겁 먹고 나니 새벽 다섯 시였다.
남자의 목소리는 달빛 입자들이 트월킹 하듯 들렸다.
“맞다, 루달 씨. 어머니 걱정하시니까
막내고모는 새벽에도 깨어 계신다면서요.
제 휴대폰으로 전화해 봐요.”
그렇게 두 번 만나고
일주일 내내 전화통화만 하던 사이였지만,
나는 그 새벽
자매처럼 지내는 여시 막내고모네로
남정네를 데리고 가게 됐다.
소개하는 자리가 된 것이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새벽달 먼지 냄새와 그의 데오드란트 향기는
뇌 리모컨 누르면 되살아난다.
곧 만나요.
여시 막내고모네서부터 우당탕탕
결혼 직행까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