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끼

by 루달


내 아이는 먼 조상님 닮았다.
머리털은 덥수룩했고,
울다가도 젖을 물리면
이조판서인 양 점잖게 쪽쪽.

이유식 첫날,
그릇을 싹 비웠다.
그야말로 발우공양.


주스를 너무 마셔
컵에 맹물을 가득 줬다.
원효대사 해골물이라도 마신 듯,
꺼억 트림하고 상황종료였다.


보행기로 집안을 신나게 휘젓다가도

기가 막히게 냉장고 앞에 멈춰 섰다.

두 손가락으로 문을 찍으면서
"꼬기. 꼬기."

배운 첫 단어가 엄마, 아빠, 고기.

이런 애였다.



내 생일날, 친구들이 집 앞 고깃집으로 왔다.

명품 옷의 무리들이 입구에서부터 눈에 띄었다.


난 맞는 옷도 없었고 푸대자루 같은 걸 씌우고 갔다.

가운데 내 자리를 비워둔 게 보였고,

덩어리로 변해버린 나는 쿵쿵 걸어갔다.

친구들은 놀란 눈빛을 애써 돌렸다.


애들은 불판 위 고기를 뒤집고, 나를 한 번 뒤집어 봤다.


"루달아 네가 좋아하는 고기 시켰어 "

좋아하는 건 맞는데, 고기보다 공기가 더 질겼다.

많이 먹으라며 접시를 밀었다.

나는 입이 아니라 눈치를 씹고 있었다.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루달아 네 신랑 퇴근하고 바로 오라고 해."

집에 있던 남편은 도련님에게 아이 맡기고 도착했다.


자기 생일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박수만 없었다.

앉자마자 고기를 집었다.
양심을 불법주차했나.


친구는 남편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우리 루달이 아들도 낳고, 사랑스럽죠?

몰래 깜짝 생일 선물 준비하셨죠?"


남편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뱉었다.


"개뿔!!"


친구들은 숨을 들이켜 먹듯이 멈췄다.

개뿔 한마디로 내 체면은 지하로 곤두박이칠 쳤다.


집으로 걸어오면서 남편에게 따졌다.

선물은 바라지도 않는다고. 근데 왜, 친구들 앞에서.


남편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내 목소리는 그의 등 뒤에서 흩어졌다.


점점 아이만 보고 살았다.

그게 순종인 줄 알았다.


돌 무렵.

거실엔 남편과 도련님이 TV를 보고 있었고,

아이는 보행기로 놀고 있었다.


나는 안방 바닥을 걸레질하다

문 뒤 먼지를 닦으려 문을 벽에 밀었다.


순간, '아작' 소리와 함께

섬뜩한 진동이 전해졌다. 뿌드득.


세상이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 고요해졌다.
방금 들린 아작소리가 내 손끝에서 난 것인지,

문틈에서 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내 사고는 그 찰나의 진동에 박제되었다.


보행기 위에서 나를 향해 오던 아이.
너덜 해진 손톱과 뭉개진 붉은 살점.

날카로운 문틈에 낀 아이의 손가락.

뇌는 이것을 정보로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아이 입은 얼굴만큼 벌어져 있었다.


아이의 고통이 소리가 되어 터져 나오기 전까지,

그 짧은 몇 초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악! 응애—!"

​그제야 멈췄던 내 심장이 욱신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동아줄에 묶인 듯 뻣뻣했던 팔다리에 감각이 돌아왔다.
비현실적인 고요가 깨진 자리에,

날것의 지옥이 펼쳐졌다.


남편과 도련님은 아이 비명소리에 뛰어왔다.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고 응급실 갈 준비를 서둘렀다.


그 순간, 남편의 손이 내 얼굴에 날아왔다.

쳤다.

"퍽"

뺨이 돌아갔다.


아이의 비명보다 더 따가운 정적이 방 안을 채웠다.

연달아 충격으로 뇌 회로가 엉겨 붙어

순간 아무 말도 못 하는 바보가 되었다.


억울함보다 먼저 찾아온 건 비현실적인 고요였다.


싸울 틈도 없이 삼성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까무러치는 아이의 손을 차마 잡지도 못한 채,

꿰매는 의사 선생님 옆에서 나는 유령처럼 서 있었다.


첫 번째 바늘이 들어갔다.

내 좌심실과 우심실을 관통하는 통증으로 느껴졌다.

두 번째 바늘이 들어갔다.

아까 맞았던 얼얼함이

아이의 살 속으로 함께 꿰매지는 것 같았다.


​마취도 없이 진행된 처치.

톱날 같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천장에 꽉 차는데,

나는 그만 눈이 풀려 웃고 있었다.

공황인지, 체념인지, 아니면 미쳐버린 건지.


"야 정신 차려!"


남편이 내 몸을 흔들었다. 귀까지 붉어진 채 기침을 쏟는 아이를 보며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왔다.


성장판을 건드려 손가락이 안 자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이 이명처럼 들렸다.


아이를 안고 집에 가는 길.

택시 앞자리에는 남편이 탔다.

남편의 뒷모습은 지독하게 이질적이었다.


그 뒷덜미를 노려보며 내 인생에서

'남편'이라는 단어를 도려냈다.

이 결혼은 틀렸다는 확신만이 붕대처럼 감쌌다.


내 품의 아이는 울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

창밖 가로등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

잠깐씩 얼굴을 비췄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를 눕히자마자

남편은 소리쳤다. 내가 잘 못 봐서 이 사달이 났다고.


대꾸할 가치가 없었고 방에 들어가서 전화를 했다.

엄마랑 고모한테.


고모는 차분했다.

"어휴… 나도 큰 오빠한테 맞고 컸어.

일단 아이 열 안 나나 지켜봐."


​그 차분함이 칼날처럼 날아와 꽂혔다.

사실 나도 사춘기 시절, 오빠에게 맞고 자랐다.

우리 집안 여자들에게 폭력은 피할 수 없는 소나기 같은 것이었을까. 지독한 상처의 굴레였다.


차분한 고모와는 달리 엄마는 흥분했다.

"지금 당장 갈 테니까 끊어!"


20분 뒤 초인종이 발작하듯 울렸다. 엄마였다.

신발 한 짝이 문 앞에 뒤집힌 채로 남았다.

남편 쪽은 보지 않고, 외손주의 붕대 감긴 손을 만졌다.

사과와 변명이 비집고 들어올 여백은 없었다.


"귀한 내 새끼를 때려! 루달이 당장 짐 싸!!"


단호한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큰 가방에 구겨 넣었다.

아이 옷, 포대기, 우유병, 기저귀, 내 옷 몇 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마 손을 꽉 잡고 친정으로 갔다.


내 새끼를 품에 꽉 안은 채.


난 더 이상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파도 위에 서 볼 계획이다.

가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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