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날

by 루달


​인생을 반품하러 왔다. 아이 하나만 달랑 안은 채로.


친정집에는 방이 세 개였다.
안방은 장남 오빠 차지
남향해 잘 드는 방은 동생 방.

엄마, 나, 아이는 작은방.

이 집은 햇빛에도 서열이 있었다.


오빠 나이는 서른넷. 영혼은 러키세븐.


엄마가 직장에 간 후, 밥도 안 먹고 기다렸다가

퇴근하면 쪼르르 따라가서


“어머님 소문났던데요?
저 비빔국수 해주신다고… 헤~”


동생은 더 가관이었다.
온 정신이 돌아오는 날이면
신시사이저로 핸드폰 컬러링을 작곡했다.


​예술 혼을 불태우던 베토벤 영혼은

엄마가 퇴근하면 유체이탈이 됐다.


“상~~마마! 오셨나이까~”


​그 부름에 엄마는 이미 대왕대비 표정이다.
가지고 있던 가방을 툭,

동생에게 던져 하사하시더니

근엄한 발걸음으로 욕실로 납시었다.


나는 적응이 안 될 줄 알았는데 일주일 만에 옮았다.
특히 집밥이 맛있어서 적응 속도가 빨랐다.


내 위치는 기미상궁됐다.

승진은 없고 시식만 있었다.


오늘은 사골탕 끓였고 간이 알맞사옵나이다”


무술이랑 내시만 없었지,

이 집구석은 조선왕조 500년을 찍고 있었다.


난 국자를 탁 내려놓았다.

“엄마, 이젠 일하지 마 애만 봐. 내가 돈 벌게!”

나는 이제 가장이 되었고,
통장은 끝내 아니었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직장 그만두셨다.

아이를 둘러업고 전국을 도셨다.

성내천, 친목회, 계모임, 이모네, 교회...

거의 순회공연이었다.


아기가 예쁘다고 지폐를 쥐여주면

수거해서 엄마가 다 챙겼다.

"엄마는 아이 팔아 앵벌이해?"

엄마 눈빛은 이미 수금 완료였다.


아이 아빠는 퇴근 후 들렀다.
아이가 보고 싶다고 했다.
저녁밥은 덤으로 먹었다.


어른끼리는 시선이 없었다.

사랑이 식으니 예의가 우선이었다.


사업도 다시 재개했고 국방부에 거래까지 텄다.
장모한테는 양육비로 매달 200 만원을 드렸다.



이제 살 먼저 빼려고 독하게 작정했다.

산책하다가 일일 체험 쿠폰을 받았다.

인생의 전환점은 늘 이렇게 갑자기 들이댄다.


송파구 방이동, 찜질방 겸 스포츠센터.
5층엔 스테이크 레스토랑도 있었다.
보증금 1년에 500만 원짜리 고급 시설.
나는 공짜 일일 쿠폰을 갖고 갔다.
녹색 때수건 한 장 들고.


매주 토요일마다 노래자랑이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미어터졌다.

일단 신청서를 접수했다.


'아는 사람도 없겠다 에라 응어리나 쏟자'
박미경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

처절하게 불렀다.

다른 참가자들은 트로트를 불렀는데

난 그 열광의 도가니를 찬물로 부어 가라앉혔다.

앞자리에 앉은 어르신들은 무대로 나와서

살풀이춤을 추셨다.


응어리를 쏟았더니 문이 열렸다.
감정은 묵혀두지만 않으면 쓸모가 있었다.


1등을 해버렸다.

나도 놀랐고, 심사위원도 놀랐다.

인생이 오작동을 냈다.


상품은 한 달 무료 찜질방 입장권.


그날부터였다. 밑천을 뽑았다. 제대로 뽕을 뺐다.

새벽이고 저녁이고 들이닥쳐서
냉탕 불한증막 냉탕 불한증막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내 모습은 마치 인간 티백 같았다.


지방이 우러나올 때까지 나를 뜨거운 물에 우려냈다.

다음 생엔 현미녹차로 태어나

한 번쯤은 제대로 우려 지고도 싶었다.


쫓기는 사람처럼 계속 지방을 괴롭혔다.
결국 10kg 탈출.

코끼리 모습은 걷어냈지만 아직은 물먹는 하마였다.


​남들은 나보고 오리처럼 뒤뚱거린다고 비웃었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오리랄하면 수 있으니까.


공짜 입장권이 바닥나갈 즈음,

월 장원 대회에 나오라고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빅마마의 ‘체념’ 불러재끼고 또 1등!

이쯤 되면 나도 의심스럽다.


상품은 스쿼시 이용권 한 달이었다.
라켓을 공중에 파리 잡듯 쳐댔다.

공이 날아오는 게 아니라

잡놈이 날아온다고 생각하며 후려쳤다.


스쿼시 공은 내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이건 운동이 아니라 구마 의식이었다.

헬스장이 아니라 퇴마당.


또 5kg 감량. 총 15kg 쫓아냈다.

​지방 15kg을 떼어내니 내 영혼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동안 살을 빼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나를 짓누르던

타인의 시선을 깎아내고 싶었던 거였다.


결국 연말 결선까지 올라갔다.

대상 상품은 지젤 냉장고였다.
때마침 동네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해뜨니와 해지니한테.


해지니는 자이브댄스 강사라 안무.

해뜨니는 뮤지컬배우라 표정.

나는 막가는 인생이라 막춤을.

각자의 상처를 무대로 가져가기로 했다.


몸빼바지를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뽀글이 가발에 선글라스를 꼈다.

이미 사람은 아니었다.

박진영 ‘허니’ 댄스곡을 불렀다.


손가락으로 공중을 찌르고 다리를 휘둘렀다.

셋다 리듬 못 맞추고 고장이 났다.


타조알에서 잘못 태어난 송충이 세 마리였다.

해뜬이는 몸이 접혀서 다른 차원.

해지니는 구겨진 이불이었다. 생존 중.


관객들이 먼저 쓰러졌다.

우리는 특별상과 인기상을 싹 쓸어갔다.


상품은 1년 동안 골프장. 스쿼시. 수영장.
찜질방까지 모두 무료 이용권이었다.


그 뒤로
행사마다 불려 다녔고,
구청장이 임명장을 수여해 줬다.
서울레저 홍보대사!


난 아쿠아로빅을 무료로 배웠고

살은 10kg를 더 뺐다.


길거리 쿠폰 한 장을 투자해서,
수익은
-25kg, 직함, 인맥, 건강.
생각보다 많이 건졌다.

워런 버핏도 이건 못 이길 최고 수익률!

인생이 웬일로 정상 작동했다.


살은 빠진 게 아니라
짐을 내려놓은 것이었다.
몸에 쌓인 게 지방만은 아니었으니까.


오리지을 찾으러 다시 출발한다.

33살,
삼삼하게 간다.

월, 목, 토 연재
이전 10화내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