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 중학교 입성

내 사랑 마이마이

by 루달



“우… 훗! 우… 훗!

빌리진 낯빠써어~”

1987년, TV만 켜면 마이클 잭슨이었고,

어느새 빌리진에 흡수돼 갔다.

그땐 잠깐 미국 시민이 되는 기분이었다.






난 드디어 중학생이 됐다.

학교는 잠실대교 입구 옆, 한강을 바라보는 건물이다.

걸음마다 들썩들썩 거리며 향해갔다.


교문 앞부터 학생 주임은 막대기를 매만지고 있고,

그 옆에는 선도부 한 명이 표정을 숨긴서있다.

우리를 예리한 눈빛으로 위, 아래 쓸어보고,

낯선 시선에 눌려 고개를 90도 숙였다.


순식간에 세상이 밥숟가락 밑바닥처럼 어두워졌다.


티셔츠에 영어 써진 애는 도시락통으로 가리고,

무스 바른 애는 머릿결을 만지작 거리며 흩뜨렸다.

학교 배지를 안 달고 온 애는 엎드려뻗쳐를 했다.

규칙은 요가 3단계처럼 복잡했지만,

우리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검문을 지났는데도 뒤통수까지 서늘했다.

순식간에 LTE가 3G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통과만 하고 존재감은 최저 밝기로 살겠습니다.’


기대했던 첫날이 이렇게 굴러갈 줄은 몰랐다.

첫 수업은 영어 시간.

선생님은 개나리빛으로 염색한, 늘씬한 여성이었다.

난 연습해 둔 발음을 칭찬받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발음 따라 하기였다.

“자, 디스 이즈 어 북.”

그 소리와 동시에 반 전체 혀가 뒤집혔다.


앞줄 애는 'This'를

“디아이쓰 이즈오오 보크 하고,

뒷줄 애는 혀를 반쯤 말다가

“드씌…즈어붘!” 괴로워 보였다.


난 볼 빵빵하게 큰 소리로 질러댔다.

“디스 이즈 어…뿍!!"

열정이 리듬으로 튀어나온 것뿐인데,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의 딱 뼈딱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갑자기 내 책상을
‘탁.’ 쳤다.

나는
‘억.’ 했다.

그 이후론 나대지 않았고,
낑깡이 됐다.


우리는 끓어오르는 학구열을

정철 영어 테이프와 성문 기본영어책으로 시작했다.

다들 테이프 늘어질 때까지 돌려 듣지만,

정작 목표는 발음이 아니라 뽐냄이다.

최고 자랑템은 마이마이 소형 카세트!


가방에 넣고 걷기만 해도 존재감이 폭발했다.

의도적으로 이어폰을 호주머니 반쯤 보일락 말락.

선이 2cm만 보여도 그날의 허세는 이미 완성됐고,

난 도시의 스파이 같았다.


라디오에서 좋은 음악 나오면, 반사신경이 발동했다.

'떨꺽 ~녹음! 일시정지! 해제!'

녹음 버튼 하나에도 특공대 해체식처럼 전신을 던졌다.

만족할 만한 리스트를 수집할 때는 짜릿했다.



우리는 음악의 신이 강림한 듯,
눈을 감은 그 공간 속에 젖어 있었다.


"얘들아 조덕배 꿈에 들어봤니?"

“히히 너네 오토리버스 돼?"

"너네 빱~쏭 스피디원더 알아?"


SONY면 귀족, Aiwa면 중산층.

일본 보온밥통까지 있으면, 로열패밀리족이었다.

명품을 꺼낼 때 교실 분위기는

마술사 모자에서 비둘기 튀듯 확 터졌었다.


“아빠가 곧 사준다 했어…1등 하면”

애들은 확인되지 않는 말을 엉키며, 희망을 대출했다.

영어 발음보다 카세트 브랜드가 신분증이었다.


그다음 날은 교실 전체가 청자켓 바다로 변했다.

박혜성이 우상이라서 죄다 푸른 비늘빛을 입었다. 머리카락을 한 줌 묶은 곳은, 숨 쉬는 안테나.

이건 교실이 아니라 아쿠아리움이었다.



초등학교랑 달리 교실에 여자들만 있었다.

과목마다 선생님들이 바뀌어서, 내 정신도 교체됐다.


집에 돌아오니 동생은 마이클 잭슨 춤을 따라 했다.

"빌리 지인 나빴어얼~ 쉬 져쪄 걸 응응 으흐흐 "

들리는 대로 발음하고, 공중에 발을 후려 차며 세웠다.


남동생이 오빠 편에 붙어 나를 괴롭힐 땐,
꼴도 보기 싫었지만…
중학생이 되고 보니 슬슬 귀여워졌다.



부엌으로 가서 커튼을 촥 치니, 엄마는 쌀통을 열고 분주하게 퍼냈다.


"왔니? 가스 위 주전자에 보리차 좀 넣어"

"근데 오빠는 왜 안 보여?"

"쉿! 과외 수업받으러 갔어"


성적표에 양, 가로 물들어 있던 자리를 오빠는 열심히 세탁하였다.



압력 밥솥이 치익 치익 숨을 뿜을 때, 씻으러 들어갔다.

밥을 한 공기 반 먹고선,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침대 밑에 숨겨놨던 영화 포스터를 벽에다 진지하게 꾸몄다.


10시가 되면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를 들었다.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노래가 방을 채웠고,

그 잔잔한 향기를 덥고서 스르륵 잠이 들었다.


운동장 무대는 끝났고,
이젠 비밀기지 내 방에서 중학생 생활이 시작됐다.





*낑깡 ->금귤

keyword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