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해는 내밀고, 아지랑이는 하늬바람과 흔들렸다.
그 자리에 달은 막 얼굴을 채울 때였다.
문득 나의 뿌리가 궁금했다.
"엄마 엄마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어?"
"시집왔을 때 이미 안 계셨어. 나도 들은 얘기야 "
"빨리빨리 얘기해 줘. 뭔데?"
"할머니는 처녀시절 신학대에 다니셨고..."
난 턱을 밀며 귀를 쫑긋 세웠다.
엄마는 방에 걸린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조선왕조 500년보다 더 복잡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오사카에서 아이 두 명을 낳다.
광복절이 되자, 해남에 와서 자녀 네 명을 또 낳다.
큰 고모는 진도 남자랑 결혼해서 자녀 3명을 낳다.
서울에서 할머니는 큰 딸이랑 동시에 아이를 낳다.
같은 해에 모녀가 막내들을 낳았다.
할아버지는 막내가 태어난 뒤 곧 지병으로 떠났다.
증조할머니도 일 년 뒤에 아들 사망으로 떠났다.
큰아버지는 스물아홉에 연탄가스로 떠났다.
할머니도 한 달 뒤에 충격으로 떠났다.
연상(連喪) 혹은 줄초상이라 했다.
부모님은 옷깃이 스쳐서 결혼을 하셨다.
아빠는 7살, 11살, 16살 동생 세명을 데리고 왔다.
엄마는 시동생 꼬마들을 키우면서 우리 셋을 낳다.
막내고모는 일곱 살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됐다.
자주 공치사(功致辭)와 기억의 변곡점을 섞으며
“새언니 나도 어린데 왜 똥기저귀 다 빨라고 시켰어!”
“고모 내가 언제 시켰어!”
옆에서 엄마는 왜곡된 기억을 짚어주셨다.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정황상 막내고모 주장에 한표.
증거도 없는 육아노동 영수증을 평생 구경 중이다.
북적북적하던 대가족의 세대주가 38살에 떠났다.
시집·장가로 한 명씩 집을 떠났다.
삼촌 두 명, 막내고모가 떠난 집에는
엄마, 나, 오빠. 동생 4명만 남았다.
막내 고모의 남편은 큰 고모부의 동생.
나는 결혼 전엔 그냥 ‘삼촌’ 부르다가
결혼과 동시에 ‘막내고모부’로 직급이 바뀌었다.
어른들은 맞 사돈이 결혼했다고 했다.
호칭 하나가 인사이동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큰고모 자녀 4명들 입장에선 더 복잡했다.
어제는 작은아버지, 작은 엄마.
오늘은 막내 이모부, 막내 이모.
족보표는 매번 새로 프린트해야 했다.
촌수는 왜 늘 사람 머리를 때리는지 모르겠다.
엄마 쪽도 만만치 않았다.
반남 박 씨 외할아버지는
광주에서 인력거도 있고 부잣집으로 살았다.
본부인이 아이를 못 낳자
외할아버지는 우리 외할머니를 데리고 왔다.
외할머니는 본부인과 세 명이 한집에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박 씨 집안 장손이라
가문을 이어갈 아들이 필요했다.
외할머니는
'이번엔 아들이겠지' 누적 희망했지만,
결국 딸만 여섯이 줄줄이 태어났다.
외할머니는 반남 박 씨 호적에도 못 올랐고
시집살이와 제사를 전부 떠안았다.
외할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시자
문중에서 양아들을 호적에 세운다고 했다.
엄마의 작은아버지 아들은 논밭과 집을 상속받았다.
외할머니와 딸들 여섯 명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막내고모는 아들을 낳고 싶었지만.
주르르 딸만 네 명을 낳았다.
결국 씨앗이 자라는 동안,
기척 없는 바람 하나가
나무를 스치면
잎사귀는
소슬바람에 떨어지고,
떨어진 잎들은 흙이 되고.
남은 가지들은 그 위에서
사계절을 버티고.
그렇게 쌓인 자리에서
우리는 또 한 그루가 되었다.
가계도는
누군가 누구를 낳고,
누군가 누구를 떠나고,
누군가 누구를 호칭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앎’을 관찰하는 순간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