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날갯짓
최근까지 오랫동안 회피가 주요 전략이었던 음식 알레르기 영역에서
경구면역요법이라는 획기적이고, 적극적인 치료법이 등장했다.
아직 승인되지도 않은 실험적인 단계의
치료법이긴 하지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고, 먹을 수 있는 시기를
하루라도 더 앞당기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했다.
이 치료법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음식을
조금씩 먹여서 아이의 면역 시스템에 내성이
생기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도 나이가 너무 어리면
의사소통이나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외국에서도 만 4세 무렵(우리나라 나이로 5세)부터 이 치료방법을 고려했다.
아내도 음식을 차단하면서 좋아지기만 막연히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가 5세가 되면 경구면역치료법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발목을 잡았던
또 한 가지의 원인은 그마저도 국내에서는 집에서 거리가 먼 수도권의 일부 병원에서만
치료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간단한 치료와는 다르게 음식을 소량으로
여러 번 나누어 먹이며 아이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간도 많이 걸리자만
한 번에 할 수 있는 치료는 한 가지뿐이었다.
유발 검사가 있는 날이면 하루가 꼬박 걸렸고,
한번 치료가 시작되면 도중에 쉽게 중단할 수도 없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망망대해에서
장기 레이스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 부부에겐
거리가 멀다는 것은 시작도 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코로나'로 인한 펜더믹 현상이 발생했다,
우리가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코로나는 세상을 참 많이도 변화시켰다.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곳은 바로 학교였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비대면 학습으로 인해
수업은 온라인으로 완전히 모습을 바꾸었고,
어른도 쓰기 불편한 마스크를 하루 종일 끼고
생활하는 덕분에 1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아이를 길에서 만나 마스크 벗은 모습을 보고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해프닝도 겪었다.
당시 아내는 학교에서 보건교사로 일하고 있었고,
전염성으로 인해 개학이 점점 늦어지면서 학교도 준비할 것들도 많아졌다.
개학 후에는 코로나가 확진된 학생과 교직원들에 대한 역학조사와 유증상자 관리까지
학교 내의 유일한 의료인인 보건교사의 일이 되었다.
갑자기 늘어난 업무로 퇴근 후에도
쉴 틈이 없었고, 주말에도 출근을 했다.
평소 꼼꼼한 일 처리로 빈틈이 없었던 아내는
일도 육아도 모두 완벽하게 처리하려다
그만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원인 모를 출혈로 대학병원 중환자실 신세까지
지고 나서야 겨우 회복됐던 아내는 병원 치료를 받는 순간에도
본인이 아니면 삼시 세끼가 해결되지 않는 아이 걱정 때문에 마음 편하게 쉬지도 못했다.
그렇게 강제로 휴식기간을 갖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순간에도 하염없이
정보를 찾았다.
그러다 그동안 수도권에서만 가능했던
경구면역치료가 집에서 승용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인근 병원에서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수도권 병원에서
치료를 했던 교수님 한 분이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 모양이다.
거리가 멀어서 머뭇 거리도 했지만,
이제 치료가 가능한 만 5세가 되는 시점이라
우리 가족에겐 마치 황무지 허허벌판에서
황금밭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치료를 시작으로 하나하나 새로운 음식을
시도하며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늘어갔다.
훗날 태어난 지 7년 만에 처음으로
짜장면과 햄버거를 먹어보는 신세계도 경험하게 되었다.
아기 새가 수천 번의 날갯짓을 반복한 끝에 하늘을 날 수 있듯이
아내는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순간
에도 아이의 알레르기를 위해
계속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