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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가꼬 Dec 30. 2022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가 꿈

아내와 아들과의 첫 만남

학교는 나의 일터

경찰관이지만 스쿨폴리스가 된 후 나는 주로 학교에서 일했다.

학부모, 교사, 학생들을 상대로 강화된 학교폭력처벌에 관한 법률에 대한 교육을 했고,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담당교사와 가, 피해학생 및 학부모들에게 사안조사부터 조치까지 절차를 설명하고 조언을 했고, 교육청 담당 장학사, 상근변호사와 함께 학교를 돌며 학교폭력에 대한 처리가 절차대로 잘 처리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도움을 주는 컨설팅도 했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OO중학교에 학교폭력 현장 컨설팅을 갔다. 물론 늘 함께 다니는 담당 장학사와 교육청 상근 변호사와 함께 동행했다.

학교에서는 도움을 주기 위해 방문하는 컨설팅단을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컨설팅 장소는 대부분 상담실에서 진행한다. 학교 측에서는 교감과 학생부장교사 상담교사와 보건교사 등이 주로 참석했다. 하지만 본교의 컨설팅에서는 보건교사가 다른 업무로 빠져 있었다.

 

잠시 후 같이 온 변호사가 도중에 밖으로 나가더니 꼭 확인할 게 있다며 보건교사를 데리고 왔다.

학교에서 준비한 자료를 열심히 보고 있던 나의 옆구리를 옆에 앉아있던 교감이 손가락으로 찌른다. 고개를 들고 함께 온 보건교사를 보게 되었다. 갑자기 그쪽이 환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게 아내와의 첫 만남이었다.


러브스토리

함께 간 컨설팅 단장인 담당 장학사는 아주 꼼꼼하게 점검을 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그 덕분에 미리 담당 분량의 점검을 마친 나와 변호사는 함께 테이블 위에 준비된 떡을 먹으며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갖게 되었고, 함께한 상담교사가 도중에 밖으로 나간 보건교사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이와 고향, 사람이 너무 진국인데 아직 결혼전이고 애인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첫인상도 좋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호감이 더 커졌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후회하기 싫었다. 지금의 아내가 혼자 있던 보건실로 용기 내어 찾아갔다.

그런데 아내는 묻지도 않았는데 이번 인사에서 고향인 대구로 전출을 갈려고 신청을 해놓았다며 미리 강화벽을 단단하게 친다. 확실하진 않지만 갈지도 모른다며 관심을 보이는 나를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그렇게 몇 마디 대화를 끝내고 첫 만남은 끝이 났다.


아뿔싸 정신이 없어서 전화번호도 물어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대로 끝내 순 없어 몇 번 망설이다 보건실로 전화를 했더니 아내가 받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지금 바쁘냐며 핸드폰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는다.

이건 뭐지? 긍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정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그 후 따로 전화해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고, 대구 전출이 무산되면서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됐다. 그렇게 1년간의 불같은 연애 끝에 결혼에 꼴 인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함께 갔던 변호사, 옆구리 찌른 교감선생, 시간을 끌었던 장학사, 옆에서 바람을 잡았던 상담교사와의 타이밍이 절묘했다.

당시 아내는 연고도 없는 울산으로 발령받아 혼자 원룸에서 쓸쓸하게 3년 동안이나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좋은 짝을 만나 결혼하려고 여러 번 소개팅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고향인 대구로 갈려고 신청해놓은 차였다. 만약 대구로 발령이 났다면 성사되기 어려운 만남이었다.

모든 것은 타이밍 덕분이었지만, 우리는 스쿨폴리스라는 제도가 만들어준 진정한 스쿨과 폴리스와의 인연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네 번째 만남인 크리스마스이브날 함께 술자리를 끝내고, 재미 삼아 봤던 스님의 사주팔자가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스님 왈 "두 사람이 이승에서 만날 확률은 18만 분의 1일 정도로 아주 귀하고 좋은 사주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행정고시에 합격할 사주다"라는 것이다.

아내는 그때 이 사람하고 결혼을 해야 되는가 보다 생각했단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가 꿈  

그렇게 결혼을 하고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에 함께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고 아침잠이 많은 아내를 위해 도시락을 쌌다.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시간들이다.

그런데 1년쯤 지날 때까지 아이 소식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혼자일 때는 언제 결혼하냐?, 결혼하면 언제 애를 낳을 거냐? 통과의례처럼 묻는다. 우리 부부는 늦게 만나 서로 나이도 있고, 더 이상 기다리지 말자며 병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렇게 시험관을 선택했고, 그 어렵다는 시험관을 1번 만에 성공했다.

기적처럼 찾아온 아들의 초음파 사진을 보며 하루하루 만날 날을 손꼽으며 기다렸다. 때로는 아이가 들으라고 배에다 데고 노래도 부르고, 책도 읽어 주었다.

그러던 중 아내가 급하게 날 부른다. 빨리 짐을 싸란다. 양수가 조금씩 세고 있어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한단다. 미리 싸두었던 짐을 챙겨 아내와 병원으로 갔고, 그때부터 진통이 시작되었다.

나는 너무 놀라 갑자기 터진 딸꾹질이 아들이 나올 때까지 멈추질 않았다. 그때부터 가족분말실에서 아들과 처음 만날 때까지 줄곧 아내와 함께 했다. 옆에서 딸꾹질을 해대며, 진통으로 예민해진 아내의 오만 짜증을 다 받아가며 말이다.

 

"곧 나올 거 같아요"라는 담당 간호사의 예고만 벌서 수차례 들었다. 그런 후 아침 9시 25분경 드디어 건강한 아들이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내민 내 양쪽 엄지손가락을 꼭 잡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들과 처음 만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의사가 아들을 보자마자 건넨 한마디가 아직도 생각난다 "와 진짜 축구공이랑 똑같다" 그만큼 동그란 머리를 가진 똑똑한 아이란 뜻이었다. 그때 손에 낳은 촉감과 냄새, 직접 가위로 자른 탯줄 등 모든 것들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결심했다. 너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가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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