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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Jul 20. 2019

빼기는 더하기보다 어려워.

그러니까 너무 처음부터 많이 채우지 말자.





빼기는 더하기보다 어려워.



벌써 거의 10년 전인가, 중학생때 잠깐 취미로 방과 후 미술 수업에 다녔다.


4B연필로 명암을 표현하는 수업이었다. 초등학생 때 미술학원 좀 다녔다고 콧대가 하늘을 찔러버린 나는 스케치북이 시작하는 모서리부터 4B연필을 열심히 좌우로 움직이며 공간을 칠했다. 진하게 채우면서 점점 손에 힘을 빼면서 연하게 그라데이션을 만드는 마무리를 할 계획이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해야지. 다른 애들은 여러 번 수정하는 동안 나는 이거 한 번이면 끝내야지.'

어린 마음에 들떠있던 나에게 선생님은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걸어주셨다.

여기서 지워봤자 이 사단이다.


빼는 게 더하는 것보다 어려워.

그러니까 처음에는 최소한의 선만 그리자. 부족해 보이면 채워 넣으면 돼.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채워버리면 수정할 수가 없단다. 선 하나하나를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으니까.


선생님이 해 주신 이 말씀이 생각나는 요즘.



스케치북의 끝부분부터 죽어라고 연필로 채우던 중학생은 이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

대학을 와서 발표를 참 많이 했는데, 발표 시간 주의사항으로 "적어도 n분은 넘기세요"보다 "n분 넘으면 감점입니다."를 더 많이 들었다. 발표 시작 전에 학생들끼리 주고받는 "너 몇 분 나왔어?"라는 질문은 그 많은 것들을 N분 안에 다 어떻게 구겨 넣었어? 의 의미였고, 다른 사람들이 발표 시간을 넘겨서 삐삐 삑! 하는 알람 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발표를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같이 마음을 졸였다.

다다익선과 과유불급.

물론 과유불급이 맞다는 말이 아니다. 많은 것이 나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건 아니다. 적당히 많아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나는 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 주변에는 처음부터 많은 것을 채워 넣으라는 분위기가 있다.  학생들에게 이 직업을 위해, 이 학과를 위해, 이 대학을 위해 자신이 뭘 했는지 구체적으로 최대한 많이 적어놓으라고 하고 포트폴리오에 한 줄이라도 더 적으라고 하니까. 그런 과정을 거치고 겨우겨우 대학에 들어왔다? 대학에서도 여전히 그 과정을 지나고 있다.

그 말이 더 당연했던 그때 유일하게 나에게 "빼기는 더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한 선생님. 중학생의 눈높이에 맞춰서 처음부터 허접할 권리를 가르쳐 준 그 선생님. 2주간의 방과후 미술 수업의 그 선생님은 친구따라 4B연필 하나 들고 들어온 학생의 어깨의 힘을 풀어주고 있다. 10년이 지났는데!

 

우리는 700자의 글을 쓸 때, 처음부터 많이 썼다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1000자를 훨씬 넘겨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몇 번이나 서론으로 1000자를 넘겨버리고는 '100자 이내로 설명하시오'의 글을 뒤늦게 다시 깨닫는다. 처음부터 너무 많이 발표 자료를 만들어버려서 ppt장수가 50장이 넘어가버린 조원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요즘. 나는 처음부터 최소로 공간을 채우려는 연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공부를 하듯이 목차나 목록을 만든다. 그것부터 시작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중요한 일이라면 최대한 간단하게 종이에 적어본다. 

'병원 예약' ㅡ '병원 3시에 예약' ㅡ '병원 3시에 예약전화로 내일 5시에 예약' 이렇게 더해간다. 발표 준비도 비슷하다. 

A를 넣는다. B를 넣는다. C를 넣는다.


A를 넣는다. a도 넣는다 aa도 넣는다. B를 넣는다. b도 넣는다. bb도 넣는다. C를 넣는다. c도 넣는다. cc도 넣는다.


 물론 아직 중요한 것만 쏙쏙 가져오거나 중요한 것의 우선순위를 한 번에 알기에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기에 결국 빼고 있다.

RESTART



그래도 조금씩 생각하다 보면 나아지지 않을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내가 할 수 없으니 일단은 포기하는 것들을 솎아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더하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아니, '그나마 덜' 빼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여전히 처음부터 너무 많이 채워넣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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