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표현하는 연습 중

느끼지 못할 감정은 없다.

by chul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아니, 못 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왔다.


2년 전, 첫 번째 심리상담을 받았다.

심리상담이 끝나기 직전 회기(1회를 회기라고 한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상담을 시작하자마자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상담 들으면서 어땠나요?"

"저는 지금까지 심리상담에 대해서 잘 몰랐거든요.. 정신건강의학과도요.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에 엄청 무지했던 것 같아요....(내가 들은 심리상담에 대한 뉴스나 소식들).....(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심리상담에 대한 전망)......(선생님과 있었던 일 중 갑자기 기억나는 일).....(뭔가의 설명)...."

"그래서요?"

"신기했고...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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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경 씨 그 감정 설명하는 데, 15분 걸렸어요.

네? 기겁했다. 황급히 옆의 탁상시계를 보니 정말 15분이 흐른 것이 아닌가! 곧 상담도 끝나고 한 회기당 50분인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아까운 시간이다. 내가 무슨 말들을 했더라?

선생님은 감정, 감상을 물어보셨는데 나는 일화나 근거, 객관적 사실들로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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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정을 단어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선생님은 그렇게 나에게 종이 하나를 주셨다.


[기쁜 감정]
행복하다, 평화롭다, 벅차오른다, 사랑스럽다.........
.........
[슬픈 감정]
슬프다, 안타깝다, 비참하다, 먹먹하다..........
..............
................
[화난 감정] 답답하다, 원망스럽다......
............

여러 감정들의 단어가 a4용지에 꽉 채워진 종이었다. 감정 표현들이 자세하게 적혀있었다. 처음 보는 단어는 아니지만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던 단어들도 있었다. 나름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쓰고 10년 넘게 일기도 써왔는데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흔한 단어라니! 이번 주는 한번 느끼고 싶은 감정, 혹은 느꼈던 감정에 동그라미들을 쳐서 다음 주에 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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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상담에서 선생님은 나의 감정의 폭이 많이 크지는 않다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나는 감정의 폭이 크지 않았기에 감정을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흔하면서도 좋은 단어, '기쁘다'에는 거의 체크가 안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과의 마지막 상담 후에, 상담을 들어서 기뻤다고 얘기하면서 처음으로 기쁘다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렇게 첫 번째 상담이 끝났다.


두 번째 상담은 학교 상담센터에서 받았다.

학교 상담을 듣기 전에 아는 상담 선생님께 이런 말을 들었다.

"상담사와 인간관계를 맺는 연습을 하세요." 상담 안에서는 모든 말을 할 수 있으니까요.


당시에 나는 첫 번째 상담 때보다 훨씬 망가져 있었고 더욱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게다가 나만의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듣는 이를 배려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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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 집중력을 저하시킨다는 것은 학교를 다니면서 뼈저리게 느꼈지만 표현능력까지 빼앗길 줄은 몰랐다. 나의 이야기는 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미친 듯이 퍼져나갔고 듣는 이와 말하는 이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다 같이 길을 잃었다. 두 번째 상담에서 선생님과 같이 헤맨 것은 당연했다. 그 와중에 하나만은 의식적으로 놓지 않으려고 했다. '표현'이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선생님과 함께 많이 고민했다. 아마 이 시기에 '감정표현 일기' 오픈 채팅방에서 활동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속상하다'는 단어를 입으로 말하고, 글로 표현하는 건, 나에게 있어서 최선의 발버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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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그 친구를 철경 씨가 많이 좋아했나 봐요.

저는 더 친해지고 싶었어요. 굉장히 좋아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요.

선생님: 그 친구가 그런 행동을 할 때, 철경 씨 기분은 어땠나요?

맨 처음에는 배신감이 들었어요. 나보다 다른 친구를 더 챙기는 건, 섭섭하지만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에게 바라는 건 많고 줄 생각은 없다는 걸 알자 기분이 나빠졌어요.

선생님: 어떻게 나빴나요?

속상했고 그다음은 어이가 없었어요. 왜 그렇게 속 보이는 행동을 하는지, 나는 머리가 없는 줄 아나 다 보이는데, 거기서 내가 상처 받을 생각은 안 하나, 모욕적이기도 했어요. 사람이라고 안 보는 것 같아서.

선생님: 그 친구를 차단한 건, 최근인데, 그럼 최근 기분은 어땠어요?

화는 아주 예전에 났었다면서요? 네. 일단 여전히 짜증 나지만 정은 떨어져서 그 친구에 대한 생각은 없는데요, 무서워요. 또 다른 친구들도 이렇게 떠나보낼까 봐.


어라, 나 감정에 대해서 바로바로 표현하고 있다. 평소에 감정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 친구에 대한 얘기를 처음 한 것은 아니지만, 기분을 물어봐준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런데 잠시 생각하자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우르르 나왔다. 게다가 순서도 바뀌었다. 일단 감정을 말하고 나서, 그 감정의 근거나 이유를 한두 문장으로 붙였다. 상황이 아니라, 감정을 느낀 나만의 생각을. 그러면 선생님이 정정해주었다. 이 감정이 아니라 이 감정이 아닐까요? 이러이러했다면서요. "그런가요?"하고 수긍할 때도 있지만 "저는 이렇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이런 감정이 아니란 말씀이세요?"하고 반문하면서 얘기가 길어질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에게 큰 변화가 천천히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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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경 씨는 지금 여기서 저랑은 감정을 잘 주고받아요. 표현도 굉장히 잘하고 계시고요. 그런데 저는 철경 씨의 여기서의 모습밖에 모르잖아요. 밖에서도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감정이 앞서면 안 될 경우도 있지만요. "

"감정을 말해야 할 경우와 아닌 경우는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건 모르죠"

"악! 그게 뭐예요..."

"일단, 한번 해 보죠. 해보고 이상하면 다음엔 안 하면 되니까요. 그래도 저는 철경 씨가 철경 씨의 감정에는 솔직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여기서는 어떤 말이든 해도 좋아요. 여기서 저랑 이제부터 연습해요. 연습하면서 천천히 다른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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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항상 감정을 남들에게 설득하려고 했다. 만약 내 상황설명을 듣고도 '왜 그렇게 느끼는 거야? 그렇게 느낄만한 일이 아니야'라는 말을 들으면 나 또한 내 감정을 다시 의심했다. 그래, 섭섭할 일이 아니야. 걔는 걔 사정이 있을 거야. 자신의 감정도 이해하지 못한 주제에 남의 상황을 먼저 이해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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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감정에 너무 각박하다.

"~~ 할만한 일은 아니야"

아니다. 느끼지 못할 감정은 없다. 충분히 화날 수 있고, 섭섭할 수 있고, 부끄럽지만 질투가 날 수도 있다. 우리는 감정에 너무 각박하다. 남들은 다 하는데 왜 난 힘들지? 하고 자신의 감정도 부정하고, 그거 힘들어할 일 아니야, 하고 남의 감정에도 각박하다. 더 최악은 긍정적인 감정에 대한 부담이다. 행복해야 하는데 왜 아니지? 하면서 감정을 설명하려고 한다. 대체 누굴 위한 설명인가.

느끼지 못할 감정은 없는데 우린 왜 감정을 의심할까? 감정은 느끼고, 알아보고, 표현해야 한다. 의심하고, 설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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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감정을 남에게 폐를 끼치는 방법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 그게 우리가 인간인 이유다. 기분이 나쁘다고 남을 때리거나 무안을 주면 안 된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잘못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신의 감정은 남이 알 바가 아니다. 당신이 알 바이다.


오늘도 감정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행동으로 번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무엇이든지 기뻐하고, 슬퍼하고 힘들어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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