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어느 날, 너무 아파서 역 근처 병원에 갔다가, 하루 종일 굶었다는 것을 깨닫고 밥이라도 먹으러 가려고 했다. 당시 갓 20살이 된 나는 혼자 무언가를 먹어본 적도, 그리고 낯선 이 거리에서 뭐가 맛있는지도 몰랐다. 멍하니 사람에게 치여서 서 있었다. 약봉투를 들고.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사람 투성이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중 나에게 괜찮냐고, 병원 잘 다녀왔냐고, 밥 먹으러 가자고 할 사람이 없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 반수 하자.(대학 입학 후에 수능 공부를 하는 것)”
'실링 왁스'라고 한다. 친구가 편지를 동봉할 때 썼던 것이 떨어져 나왔다.
당시 나는 망한 이번 생을 수능으로 다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정말 전형적인 한국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반수를 한 게 아니다. 도망을 갔다. 그냥 익숙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혼자 공부만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당연하게, 돌아왔다.
그때 나는 과거의 나한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보상심리로 이번 학기는 정말 잘 지내야 한다고 결심했었다. 이미 나의 기본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는데, 전혀 몰랐다. 나는 잘 지내는 척을 하려고 했고, 당연하게 우울증과 공황장애라는 친구를 사귀었다.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성적은 전혀 좋지 않았으며, 아무리 최선을 다 해도 F를 받기도 했다.
나는 강씨니까 G로 그려보겠다. 간단하게 그릴거니까 그냥 삼색볼펜.
당시 나는, 내가 날린 1년이 너무나도 치명적이고 내 인생의 오점이라고 생각했고, 다들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은 나에게 필요했다. 다시 대학이라는, 서울이 세상에 가기 위한 시간. 한번 데인 세상에 돌아가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에겐 필요 없었겠지만 나에겐 필요한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은 내가 다른 (흔히 말하는 입결이 더 좋은) 대학 입학에 ‘성공’(우리 모두 이걸 성공이라고 부른다.)해야만 좋은 경험과 시간이라고 인정받았다.
해파리가 아닙니다. 말미잘도 아닙니다.
그 1년 정확히는 5개월 정도를 보상받기 위한 노력과 집착을 그만두었다.
그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나는 우울증을 인정하고, 도움이 필요함도 인정했다. 이 다음부터는 내가 편하게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정말 힘들고 괴로웠다.
왜 그렇게 살아, 너는 왜 그래? 너의 고통이 참 우습다, 이해가 안 된다, 너는 무섭다.
별 얘기를 다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을 쳤으니 학과 성적이나 앞으로의 미래의 청사진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나를 달래면서 침대에 눕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나는 몇년이나 원을 그렸는데 여전히 못 그린다.
그러다가, 아주 평소처럼 수강신청을 망하고 듣게 된 특이한 전공을 만났다. 사람 수도 적어서 절대평가와 영어 수업이 되어버렸던 전공에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였다. 예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정확한 의미나 분야나 명칭을 모르다가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공부와 연구에서 보람을 느꼈다.
이를 바탕으로 졸업 프로젝트를 했고 우리 팀은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그리고, 못 할 것 같던 졸업을 했다.
가끔 실링 왁스를 꽃 위에 덮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사진 찾아보니 예쁘더군요.
갑자기 꽃빛 인생이 된 건 아니다. 난 아직 취직도 못 했다. 그러나 정말 열심히 프로젝트마다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지원했다. 그때의 최선을 다 했다. 애썼다.
그래서 이번엔 노력하려고 한다. 집중해서, 조금 더 똑똑한 노력과 준비를 하고 싶다.
대학 졸업 이후, 백수가 된 지금의 목표는 작년을 바라보면서 ‘아, 이 정도는 했어야 했네’라고 말할 수 있는 현재를 만드는 것!
괜히 편지에 동봉하는 것처럼 그려보았다.
이 정도는 해야 취업 준비라고 할 수 있지!
그냥 부딪히면서 바위에 의해 계란 같은 머리는 자주 깨져봤으니! 이번에는 그저 바위에만 부딪히지는 말고, 조금 더 작전을 세워보자!
그리고 이번처럼 시간이 많이 남아돌 때, 마음속에서만 썩어갔던 여러 '쓸데없는 일'을 해보자!
미숙했기에 반항했고 고생했지만, 나는 과거의 나에게 미안하지 않다. 나한테 사과해야 할 것들, 사람들은 따로 있다. 더 이상 시간을 보상받으려고, 보상하려고 하지 않겠다.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나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