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쓰고 그림 19
“제게 울 시간은 30분밖에 없었어요.”
그날 내 상담의 첫 한마디였다. 약속 시간까지 남은 30분, 그 시간 동안 미리 다 울었어야 했다.
그리고 상담 말미에 들은 말,
“철경 씨, 기계예요?”
굳이 기계라고 하자면 현재 철경 씨는 완전히 방전되었어요. 5%, 10% 남아있는 충전기를 충전하는 것도 시간이 들지만 완전히 방전된 충전기는 충전 모드까지 가는데도 시간이 들어요. 지금 스스로가 방전되어있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철경 씨는 지금 그 무엇도 놓치지 않으려고 완전히 날이 세워져 있지만 결국 하나도 붙잡는 게 없어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요.
“내가 나로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보여줘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급급해요.”
유독 견디기 힘든 날에 열심히 한 설 2개의 탈락 소식을 접했고, 허무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달려 나가다가 거하게 넘어졌다. 하필 저번 주에 다리를 크게 다쳤기 때문에 다리는 더 아파졌다. 그러나 그 날은 많은 친구들이 모이는 약속이 있었다. 그다음 날은 영어회화시험, 그 다다음날은 고시 통과한 ‘멋진’ 친구들과의 약속, 엄마를 만나는 날… 전부 멀쩡한 척을 해서 분위기를 흐리면 안 되는 일정뿐이다. 취업 준비 힘들지만 적당히 하하 넘기고 마는 그런, ‘여유 있는 취준생’이 되어야 했다. 말도 안 된다. 여유 있는 취준생이 어디 있나. 그러나 그들은 원할 것이다. 왜냐면 내가 멀쩡한 척을 안 하면 그들의 소중한 시간이 눈치를 보는 시간으로 바뀔 테고, 그들은 취업준비를 해 본 적이 없는 우수한 사람들이기에 모든 단어 선택마다 내 눈치를 보겠지. 난 그게 싫었다. 밥을 사준다느니, 선물을 준다느니, 전부 같잖았다. 그들에겐 일상을 옭아매는 조급함이 없었다.
삶은 무대나 연극이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내려오기로 했다.
“내가 있어야 세상이에요. 모아놓은 돈, 내가 있어서 쓰죠. 죽으면 그 돈 그냥 날아가요.”
내일 동쪽에서 태양이 뜨고, 빨래를 건조대에 넣으면 건조되고, 내가 도전하면 실패한다. 목숨만 어디선가 둥둥 떠다닌다. 이런 삶을 지속해보았자 어머니나 아버지 등골이나 부수지 뭐가 되지?
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 내가 나로서 있는 시간. 그런 시간을 보낸다고 드라마틱하게 갑자기 에너지가 회복되어서 막 우어어어! 하면서 뭔가를 잘 해내지는 않겠지만, 일단 지금의 나에게는 나를 위한 무언가가 필요한 게 틀림없다. 일단 나를 세상의 중심이 두는, 그런 방향 조절 말이다.
“여행, 다녀왔으면 좋겠어요.”
예전부터 들었던 얘기다. 여행을 다녀오라고. 하지만 시간도 돈도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모아놓은 돈은 있지만 이미 충분히 자주 까먹었고,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바다라면 만날 수 있다. 그냥, 적당히 뭐 먹고 적당히 지내고 싶다. 나더러 다들 달리라고 하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조용히 눈을 감고 내일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지만 해는 뜨고 내 눈도 뜨여지고 만다.
괜찮을까 이래도. 잘 모르겠어. 어느 쪽이든 괜찮지 않다면 어디를 택해야 할까. 방전 모드인 나는 충전 모드까지도 시간이 걸리는구나. 지금은 일단 충전 모드까지 가는 게 내 목표이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아마 당분간 목요일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 아무 때나 제 시간이 될 때 올라갈 것 같아요.
심리상담 쓰고 그림은 웹툰 형식을 띄고 있지만 제목은 '쓰고 그림'입니다. 이번에는 한 컷 한 컷마다 다양한 분위기를 내고 싶었는데, 모든 컷을 그릴려니 너무 힘들었고 쓰고 싶은 이야기는 글로밖에 설명이 안 될 것 같아서 이런 글이 나왔습니다.
다음부터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또 다른 해법을 찾아내겠죠. 저는 늘 그랬으니까요. 하고 싶은 이야기도 참 많습니다. 돈이 안 되는 글과 그림, 성과를 내야 하는 글과 그림에 붙잡혀서 저는 제가 하고 싶던 이야기를 많이 못 했습니다. 어디 소속된 작가도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당분간은, 아무 글이나 쓰고 예전부터 쓰고 싶던 브런치 북을 만들고 그러려고 합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비가 오는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