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ul Oct 05. 2020

가을은 왜 씁쓸해서는

가을에 대한 간단한 글

이제 바람 사이사이에 수능 냄새가 난다. 두 번 이상 수능을 쳐 본 사람들에게만 나는 냄새이다. 무언가가 결실을 맺을 때가 됐으며, 많은 것이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괜히 장황하게 설명했다. 연말이다.

어떻게 하면 하루하루를 잘 지낼 수 있을까, 이게 나에게 주어진 큰 시련이자 과제이다. 흔들리지 마라는데, 다들 변화하고 성장하고 걸어 나가고 떠나가는데 나만 제자리다. 하필 날씨가 따스한 봄과 다르게 쌀쌀해서 더 씁쓸하게 만든다. 

항상 가을은 나에게 풍족하며 좋은 계절이었다. 일단, 너무 힘든 한 해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했다. 언제부터 모든 일을 '해치워야 할' 일로 만들어버렸는지. 자소서든 이력서든 뭔가를 잘한다거나 정성스럽게 쓴다기보다는 해치우고 다이어리에 줄을 긋는 정도의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주는 나날은 이제 끝났다. 학생일 때는, 시간이 약이었다. 눈을 꼭 감고 이 시간이 지나가길 빌면 듣기 싫던 수업이 끝나 있고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저절로 레벨업이 되었다. 수업을 여러 번 듣는 것도 오히려 (학점에 제한은 있지만) 유리한 위치였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지나면 안 되는데 숙련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낡은 이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린다. 시간이 흐르면 안 되는 신분이 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모순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3달 뒤의 나를 생각한다. 3달 정도는, 예전에는 예전도 아닌가? 몇 년 전에 3달 정도 정성스럽게 사는 건 일이 아니었다. 어디서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린 것일까? 왜 그냥 시간이 지나가면 다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전히 눈 감도 아등바등하고 있을까. 

올해는 85일 정도 남았다. 잘, 은 아니어도 정성을 담아서 보낼 수 있을까? 해치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렇다고 성과를 내어야 한다고 조급해하지도 말고(물론 취준생은 성과를 내어야 하지만, 독이 되지 않는 선에서만.) 조금 더 다듬으면서 보내고 싶다. 얼른 지나가버려! 가 아니라, 그래 내가 그래도 참 정성스럽게 살았다, 하고 올해를 보낼 수만 있다면.

실패가 습관이 되어가는 나날이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가 이를 돕는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인 나는 일부러 달달한 라테를 뜨겁게 시킨다. '국화꽃이에요' 단골손님이 처음 시킨 아이스가 아닌 라테에 사장님은 국화꽃을 그려 주셨다. 몽글몽글하다. 날씨와 공기가 이미 칼을 품고 우리를 찌르는데, 스스로 더 찌를 필요까진 없다. 충분히 씁쓸해하고 있으니까, 조금은 보듬어주어도 괜찮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란 하늘을 그리는데 빨강을 섞는 단호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