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확신을 갖고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거나 답답한 일을 지속하는 것.
중학교 때의 미술 선생님은 거의 웃지도 않으셨지만 상냥해서 인기가 많았다. 어느 날은 미술시간에 좋아하는 명화의 부분만 인쇄해서 이어서 그리는 활동을 했다. 나는 양동이를 들고 와서, 파란 하늘이 인상적인 명화의 하늘 부분만 잘라서 붙였다. 명화에서 내 그림으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애매한 경계가 포인트였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저 하늘색이 나오질 않았다. 파란색 계열이란 계열은 다 섞어봤는데도 안 나왔다. 고통을 호소하자, 선생님께서는 슬쩍 보시더니 한 마디 툭,
빨간색을 섞어야겠네.
를 던지시곤 지나갔다. 노을이 아니었다. 오전의 파란 맑은 하늘이었다. 그런데 빨간색을 넣으라니요. 그런데 조금 섞으니 정말 그 파란색이 나왔다.
파란 하늘을 그리는데 빨강을 넣는 단호함. ‘단호함’.
요즘 나에게 필요하다. 거짓말이다 요즘 말고, 단호함을 가지는 것은 내 인생에 걸쳐서 계속될 숙제다. 나는 사람들의 말에 정말 많이 휘둘리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아는데도 나는 남들의 말에 몇 날 며칠을 흔들린다.
저번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섭다는 글을 썼다. 그 글을 쓰자마자, 우연히 친구들과 만나게 되었다. 오늘도 서류가 떨어졌으며 꽤 피곤하다며 웃자,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위로랍시고 한 말이 재미있다.
어휴, 열심히 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안되네.. 이런 사람이 잘 되어야 하는데 저는 너무 쉽게 되어가지고요… 저는 회사에서 먼저 연락이 왔거든요.. 그래서 아무 데나 들어간 건데.. 안타까워요…
아, 그때 알았다. 나는 최선을 다 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되었을 때, 내 한계가 드러남도 무서웠지만, 열심히 하는데 잘 안 되는 안타까운 애라는 시선을 받는 게 더 무서웠다. 이 말은 내 머릿속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그냥 그 순간에 “언니가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대화 주제를 돌리는 게 내 최선이었다.
일주일 정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도 항상 그 말이 따라왔다.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한둘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게 뭘 하면서도 뭘 하는지 모르는 채로 서류를 냈고, 가장 간절했던 회사 이력서에는 두 개의 실수를 저질렀다. (이건 그냥 탈락이다.)
단호함은 일단 답을 일일이 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시작된다. 나는 저 말 이후로,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최선인가? 아니면 내가 못 하는 것인가? 나는 동정의 대상인가? 나는 한심한가?라는 의문을 품고 일일이 답을 달았다. 과연 누구를 위한 답일까? 확실한 건 이걸 당사자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공중으로 흩어질 의문과 답이었다.
답은 내가 알고 있지.
고개를 치켜들고 자신감을 갖고 또다시 도전하며 나를 토닥이며 나아가는 것.
이건 나만이 알 수 있다. 선생님이 모두가 의아해하는 파란색을 위해 빨간색을 넣어야 함을 알고 계셨던 것처럼. 뭔가 논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겠지. 그냥, 그게 답이었다. 그땐 그게 정답이었다. 기분 나쁜 말은 기분이 나쁜 말로만 둔다. 그리고 또 단호히 내 할 일을 한다.
요 며칠 제대로 못 쉬고 제대로 못 했기에 오늘은 하루 종일 쉬었다. 그냥, 책 읽고 자소서가 아닌 글을 쓰고, 시간이 걸리는 요리를 했다. 그래도 여전히 무섭지만, 내일도 내가 할 일은 내가 알고 있다. 하늘을 보면서 머릿속에 생각이 고이는 것을 보니 가을이 왔다. 이때의 하늘은 정말 생각지도 못 한 형형색색의 구름들로 가득 찬다. 아무리 구름이나 하늘의 색을 인간이 분석하고 그린다 해도 예상치 못한 조합으로 나타나는 풍경이 있다. 자연만 알겠지. 자연에게 '파란 하늘색'따위의 말은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