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지, 괜찮네?

절망을 다루는 무적의 말

by chul

엥.. 생각보다 괜찮네. 흠... 뭐지….

최종에 떨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인 지 4일째. 나는 오전에 카페에 와서 여전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태평한 거지? 물론 어제 징징거리는 만화를 그렸다. 하지만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떤 절망을 소재로 쓰기 위해서는 그 절망을 객관적으로 바라고 볼 수 있는 상태로 ‘승격’해야 가능함을. 아주 날리듯이 그린 그 만화로 나는 이미 절망을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며 심지어 이를 바쁜 상황 속 잠시 쉬는 휴식 시간으로 쓴 것이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게 휴식이다. 아직 그렇게까지 진중한 글을 안 쓰기도 하고 그렇게 진지하게 얘네를 바라보지 않아서 가능하다. 만약 업인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못 했을 것이다.)

세상을 많이 산 건 아니지만 얼마 안 산 것도 아닌 지금, 이런 말하기 좀 부끄러워서 이렇게 앞에 미사여구를 붙이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또 재미있다.

절망을 대비하거나 대처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룰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엄청난 절망이든, 그냥 며칠 동안 우울하게 만드는 기운 빠지는 절망이든 어느 쪽이든 머릿속에 울리는 ‘왜’에 일일이 답을 달 수는 없다. 최종에서 합격소식을 듣지 못했을 때, 나의 머릿속은 다음과 같은 사고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연락을 안 주고 사람들 애만 태우다니 재수 없어 심지어 큰 회사잖아.

1차 합격할 때 괜히 엄마한테 말했네.. 최종 간 게 너무 기뻐서 그만... 기대하고 있을 테니 미리 연락 주자.

이제 뭘 만들지?

그래서 만들었습니다. 타코(야끼 아님. 멕시코 음식 토르티야 싸 먹는 그것)


사실 조금 어리둥절하다. 1년이 다 되어가는 취업을 바로 눈 앞에서 놓쳐버린(내 잘못이 100%은 아니지만) 취준생이 요리하고 커피 좀 마시고 책 좀 읽는다고 덜 힘들어한다니. 이렇게 사람이 단순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어차피 살아가야 한다면 계속 그 안에 있을 수는 없다. 내가 통통 튀는 멋진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미 지나간 건 보내주고 싶다.

‘어쩌면 내년까지 준비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뭘 먼저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고, 꽤 변했구나 성장했구나. 백수인 건 그대로지만 조금 ‘간지’ 나는 백수가 된 것 같다. 만약 내년이 된다면 이제 자격증을 공부해야겠지. 그리고 내년부터는 알바를 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원래 대학 졸업 이후에는 지원을 안 해주시기로 했지만, 마음이 약한 분들이라 여전히 용돈을 주신다. 하지만 이젠 하나씩 독립을 해야 할 것이다. 취직이 안 되는 게 내 탓만이라곤 생각하진 않는다. 나보다 뛰어난 학벌, 학점, 대외활동을 가진 사람들도 떨어지고 반대인 사람들도 붙는다. 그럼 아직 희망은 있고 언젠가 내 노력의 결과 내 운의 결이 맞아떨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커피 좋아하니까 열심히 다시 공부해서 카페 알바에서 매니저, 사장까지 가버릴 것이다! 어느 쪽이든 돈을 벌 곳은 있으니까. 물론 작년의 ‘00에 기여하겠다’ 던 열정이 없어져버리고 꺾여버린 건 슬프지만 사람은 변하니까. 그런 기여는 나 말고 더 열정이 뛰어난 사람들이 해 줄 것이다.

자신감이 위험한 것이, 외부의 요인에 매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서류 합격을 잘한다는 자신감을 가지려면 누군가가 나를 서류에 자주 붙여주어야 한다. 서류 합격 안 해도 괜찮다? 그게 자존감인가? 자존감은 아직 어려워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안 해도 괜찮지 않다. 해야 한다. 이 딜레마에 아직은 빠져있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있기에 뭐라도 해야 한다.



야, 나 결국 최종 떨어졌다.

같이 사는 친구에게 말했다. 그 친구는 내 쪽을 보지도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며, 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가지 마! 어차피 안 보내려고 했어! 예의가 없네 지원자에게 결과도 안 알려준다고? 허! 안 보내 그런 독한 곳.

엄청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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