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내 글이 300편이 되면, 케이크를 사서 축하하려고 했다. 지금까지 50, 100, 200 모두 케이크를 샀던가 뭘 했던가 해서 축하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냥 고기를 시켰다. 축하와는 거리가 멀지만 맛있으니까 되었다.
나는 왜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최근에는 임시 저장된 글을 신청한 분들에게 보내주는 메일링을 마무리했다. 메일링을 한 계기는, 외로워서였다. 그래서 도망쳤다. 멋진 사람들의 글과 그림이 차고 넘치는 브런치에서 우울증에 아웃사이더에 취업을 못 한 백수의 이야기를 하는 게 갑자기 눈치가 보였다고 해야 할까. 이래서 사람이 애매하게 눈이 높아지면 안 된다. 눈이 여전히 낮았으면 그냥 내 글을 썼을 것이고, 눈이 높듯이 자존감도 높았으면 ‘뭐 어때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하면서 글을 썼겠지만 이도 저도 아닌 나는 결국 글을 쓰지 못하고 그림도 그리지 못하는 방황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메일링으로 그 방황이 끝났기에 이제 메일링은 하지 않는다. (읽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해요…!)
내가 왜 브런치를 시작했을까, 나의 글에 내가 좋아하는 표현이 있다.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가고 싶다고. 생존이 위협되는 요즘이다. 코로나와 같은 사고나 사건 경제적 위기 등, 살아서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칭찬해줘야 하는 날들이다.
이런 외부적 요인 말고도, 우릴 죽음으로 이끄는 내부적 요인들이 많다. 나는 우울증을 인정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에게 글은, 인정이었다. 그것을 인정해야만 나는 아픔을 소재로 승화시킬 수 있었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글로 인해서 나는 하루하루를 연장시킬 수 있었고, 그림을 그리면서 그 하루하루를 조금 더 풍족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니 브런치는 끝내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살아있는 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생 때는 졸업은 너무 멀었고 학과 생활은커녕 제대로 된 인간관 계조 차 맺지 못한 나 자신이 무서웠다. 남들이 다 하는 거 못 할까 봐. 예를 들면 제때 취직이라던가 빠른 졸업이라던가 친구를 사귀고 가끔 밥을 같이 먹으며 논다던가. 그것들을 못 할 것이 무서워서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했다. 도망칠 곳이 없었기에 항상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보며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냈고 그 시간을 과거로 넘겼다. 나는 성적은 좋지 않지만 졸업을 했고, 잘 안되어가지만 취업 준비를 ‘평범하게’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연락 오는 친구들도 있고 가끔 싸우다가 결국 멀어지거나 다시 가까워지거나 하는 그냥 그런 관계들을 맺으며 살고 있다.
내가 보일러 소리만을 듣기를 선택했으면 나는 이것들을 누리지 못 했을 것이다.
보일러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집에서 먼 곳까지 걸었고 그곳에서 내 대학생활을 함께할 카페를 만났다. 혼자 있는 시간도 좋을 수 있음을 나에게 알려준 곳이었다. 그곳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삶의 즐거움을 오랜만에 알게 되었다. 나는 공부가 아닌 그냥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쓸 뿐이었지만 직원분들에게는 심각한 얼굴로 보였는지, 혹시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오해(?)를 받곤 하였다. 오래 있는 게 미안하여 마카롱 같은 과자를 사들고 가며 이런저런 얘기를 시작했고, 그건 내 인간관계의 회복의 시작이었다.
어찌 되었든, 살아 있었으니까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300편의 글을 쓰게 될 줄은 나를 포함해서 나를 아는 그 누구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300편 안에는 그림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300편보다 적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메일링이나 임시저장만 한 글도 많이 때문에 실제로는 300편보다 많을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다니. 고작 2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내 모습이 되어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내 브런치는 요즘 브런치의 트렌드와는 많이 동떨어진, 아무 글이나 쓰는 곳이다. 그럼에도 계속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브런치는 어찌어찌 굴러간다. 물론 처음에는 뚜렷한 주제가 있었다. 아웃사이더인 대학생활과 우울증을 가진 사람의 심리상담 치료기였다. 당시엔 브런치가 이렇게 유명하지 않았고 우울증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기에 나의 글은 정말 나만의 이야기로써, 아무도 하지 못했지만 누군가는 겪고 있을 그런 문제를 짚으려고 했다. 지금은 딱히 짚을 문제가 별로 없다. 그 시절이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내가 크게 방황했을 무렵의 글이 꾸준히 조회수가 나온다. 나이는 상관없다고 하지만 결국 나이 때별로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 존재하길 마련이다. 과거의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내 글을 읽었을 누군가에게
‘괜찮아요. 저는 친구도 잘 사귀고 어찌어찌 잘 살고 있답니다. 지금은 괴롭겠지만 이는 곧 과거가 될 거예요.’
라고 들리지도 않은 위로를 한다.
하반기의 시즌은 지나가고 있고 나 또한 남은 면접이 얼마 없다. 하지만 나의 목적은 어느 순간부터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기에 나는 괜찮다. 1년 이렇게 살았으니 이제 다르게 살아보려고 한다. 알바도 좋고 인턴도 좋고 좋지 않은 기업이어도 좋으니 세상 밖으로 나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1년 후의 나는 또 지금의 나와는 정말 다르게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이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삶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말자. 의문도 좋지만 가끔은 무조건적인 자신의 편이 되는 것도 필요하다. 나의 글이 끝내 당신을 살아가게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