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 위해 그만둬야 할 것들.

언젠가 나만의 기슭에 닿길 바라며

by chul

솔직해지자. 나는 지금 잘되고 싶은 거지만. 일단 어디든 정착할 기슭을 찾아야만 한다.


취업준비를 1년 넘게 하고 있다. 물론 인턴 경력이 있긴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슬슬 대기업을 가거나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나는 잘나지 않은 사람인데 주변에 같이 시작한 사람들은 잘나서 괜히 억울하다.

사실, 취업 준비를 시작하던 작년만 해도 나는 그렇게까지 좋은 기업에 가려는 욕심은 없었다. 졸업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 대학생활을 했다 보니까 (그 흔한 동아리 경력도 없고 성적도 엉망이다.), 대기업은 커녕 중견만 되어도 정말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나를 놀리는 건지, 주변에는 대기업을 가는 동기들이 있고 나 또한 대기업을 최종까지 가곤 하였다. 최종까지 가니까 정말 조금만 더하면 나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똑같이 1년 정도 준비한 친구가 S전자를 가면서 ‘한 끗 차이더라. 금방 될 거야.’라고 했으니까, 나도 어쩌면.


그 한 끗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기가 되고 싶은 마음만으로 한 발 한 발 앞서 나가는 과정은 꽤 괴로웠다. 주체가 내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문득 이렇게 남들 생각만 하다가는 인생 계속 괴롭게만 살 것 같다는 불안감이 불현듯이 내 뇌를 때렸다.

아, 이게 아닌가?

한 끗이 없는 게 그냥 나인가?

아오, 어쩌지. 그래도 포기가 안되는데.

그 한 끗이 뭔데, 이 되는 놈들아... 갈 땐 가더라도 알려주고 가야지... 물론 너희도 모르니까 그런 단어를 썼겠지만.


하다 하다 살아있는 것 마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 왜 괜히 살아있어서 이런 문제 저런 문제 겪어야 하나.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친다면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무엇을 그만두고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


그렇게 아이패드에 코를 박고 그림을 그리는 중, 카톡이 왔다.

어머니가 월세와 용돈을 입금했다는 톡이었다.

그만둘 것은 하나다.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 시작할 것도 하나다. 그만두기 위해 어디든 일단 기슭을 찾아서 정착을 해야만 한다. 삶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내가 살길 바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야 하니까.


이런 생각의 흐름을 거쳤다고 해서 내가 ‘잘되고 싶은 욕심’이 한 번에 내려진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나간 탈락들은 그만 돌아보게 되었다. 그 탈락에 이런저런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아예 다른 색으로 덮어버리면서 용량이 한정된 내 뇌가 탈락을 생각하지 않도록.



나를 갉아먹는 욕심과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열정의 차이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 슬프고, 분하고, 자존심이 상하지만, 아직 내 인생이 잘되었다, 잘 안 되었다,라고 판단하기에는 이른 나이니까. 내가 그들보다 좋지 않은 직장에 들어가더라도 또 다른 나만의 삶이 펼쳐져서 ‘엥 의외로 이렇게 사는 것도 재밌네’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제 미래와 과거는 그만 보고, 지금 이 순간에 뿌리내리기로 했다. 지금 순간을 꾸미고, 할 것을 하다 보면 언젠가 어떤 것일지는 몰라도 나만의 기슭에 닿을 거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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