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나더러 반수를 후회하라고 했다.

잘 한 일이 아니라고 다 후회해야 하는 건 아니다.

by chul
오늘은 리프레시하려고 새로운 툴을 써 보았습니다. 이쁘죠?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내 첫 번째 잘 못 꿰인 단추는 아마 '반수'일 것이다.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재수나 n수를 하지 않고 바로 그 해에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을 ‘현역’이라고 불렀다. 나는 현역이었다. 1n학번 현역. 9n년생.

그런 나는 기꺼이 반수를 택했다.

우리 집은 다른 집만큼, 어쩌면 다른 집보다 훨씬 더 절박하게 ‘인생의 시계’에 집착했다. 다들 나의 반수 결정을 보면서 ‘그 정도 대학이면 괜찮지’ 혹은 ‘몇 개월 만에 할 수 있겠어? 집안 사정도 생각해야지’라는 걱정을 했다면, 우리 부모님은

남들보다 1년이나 늦어져서 어떻게 하려고!

라는 걱정을 했다.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부모님 밑에서 이런 내가 태어난 것은 서로의 인생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매사에 굉장히 신중하다 못해 조심스러운 사람이다. 반대로 어머니는 중요하지 않은 일은 흘려보내고 쓸데없이 깊은 생각보다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이 둘을 적절하게 섞으면 아주 멋지고 성숙한 첫째가 태어났겠지만, 나는 그 둘을 비틀리게 닮아버렸다. 쓸데없는 일에는 신중하게 많은 생각을 하지만 중요한 일은 별생각 없이 실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꼬일 수 있는지. 어쩔 수 없다, DNA가 꼬인 모양이기 때문이다.(아무 말 죄송합니다. 저는 생명과학과 아주 먼 학문의 공대생 출신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나는 하숙집을 마음대로 뺐고, 부모님은 나의 설득의 전화를 받기 전에 수능 교재가 쌓인 내 택배를 먼저 받아야만 했다.

무슨 고양이가 저렇게 만두같이생겼냐 내가 그렸지만 너무 큐트

결과적으로 나는 복학을 했다. 당연하다. 나는 서울이 싫었다. 원래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집도 싫었지만, 갑자기 넓어져버린 서울이 너무 무서웠다. 당시 나는 지금의 나와 아주 다르게, 변화를 싫어하고 일상을 평생 살고 싶어 했다. 조금의 변수라도 생기면 진정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어쩌다가 친구 집에 자게 되면 입던 옷 그대로 입고, 이불 한 장 돌돌 말아 바닥에서 팔 배게로 꿈도 안 꿀 정도로 편하게 자는 사람이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변수를 신경 안 쓰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 계기는 분명 반수에 있다.


즉, 도망치기 위해서 반수를 했으니, 열정 넘치고 제대로 공부하는 다른 수험생들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원하는 성적을 받지 못했다. 너무 당연하게 복학을 했고, 이미 동기들은 2학년이 되어서 자기들끼리 친해져 있었다. 1학년들 또한 신입생이란 분위기로 묶여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아웃사이더의 대학생활의 시작종이 머릿속에 울렸다. 데엥 데엥 데에엥.

점점 스케치에서 벗어나는 중. 진짜 펜으로 종이에 그리는 것 같아요 모든 느낌이.

물론 반수를 안 했어도 그때 나를 생각하면 결국 비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었을 것이다. 워낙 친화력이 없는 성격이기도 하고, 술이나 커피는 혼자 마시는 걸 즐긴다. 먼저 다가가는 것도 못 한다. 그래서 후회하냐면, 모르겠다. 후회랑 반성이 모두 섞여있지만, 지금 그때를 생각해봐도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다. 그런 걸 보면, 이제 반수는 내게 별 의미가 없는 사건이 되었나 보다. 한때 미친 듯이 후회했던 선택이 지금은 그냥 과거로 애써서 겨우 회상해야 하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반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 브런치는 없었다.

내 브런치 자체가 아싸인 서울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단순히 힘들었으면 글이나 그림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고양이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여러 콘셉의 웹툰과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고양이 캐릭터를 얻은 계기도 반수에 있다.

나름 이 프로그램만의 매력이 있네요. 하지만 저는 포토샵 세대(?)라서 역시 프로 크리에이트가 더 UI가 익숙하네요... 잘 가라...

반수를 하기 위해 드나들었던 도서관은 주변 공원이 굉장히 넓었고 3마리의 고양이가 있었다. 도서관을 다니는 동안, 그 고양이들과 아주 친해졌다. 내 인생의 첫 고양이었다. 그리고 아마 내 인생 유일의 조건 없는 관계일 것이다. 직원분들이 잘 챙겨줘서 이미 배가 부른 그 고양이들은 정말 아무 조건 없이 날 기다렸다. 늘 가는 길목에 서 있었고, 멀리서 날 보면 달려왔다. 앞으로 그런 유대를 쌓을 일은 거의 없겠지.

서울로 와서도 그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승화되어 고양이 캐릭터가 나왔고, 지금의 브런치가 되었다. 그들을 찍은 영상과 사진들은 내 클라우드에 고이 있으며 아직도 내게 큰 힘이 된다.

잿빛 풍경과 파란 하늘
결국 복학했는데, 후회하지?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반수 이야기를 하면, 그럴거면 왜 했냐는 눈빛도 필수 옵션으로 받는다.

나의 복학 스토리가 누군가의 반수를 말릴 수 있는 소재로 쓰인다면 글쎄....마음대로 써도 상관 없지만 후회는, 정말. 잘.

모르겠다.

반수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곱씹어 본 것도 몇 년 만인지. 이 시리즈의 글을 쓰지 않았으면 꺼내질 일이 거의 없는 기억이다. 복학을 한 반수. 지금은 그냥 내 삶의 일부 같다. 몇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선택이었다는 게 지금은 거짓말 같다. 지금 이 순간들도 거짓말처럼 지나가겠지? 현재가 괴로울 때 나는 반수를 생각한다. 이제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잘못 꿴, 모두가 비난하는 선택. 언젠가 지금 이 순간들도 회상하려고 애써야만 기억이 나는 때가 오리라. 그걸 반수가 가르쳐줬다.


그리고 내게 고양이 친구들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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