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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 Nov 09. 2023

(프롤로그) 솔직히 죽기 싫었다.

죽음을 보류한 10계명

청담동에 우연히 지나갔는데 구찌랑 입생로랑 등등 삐까뻔쩍한 샵들이 눈에 보였다.

저런데 한 번은 들어가서 하나 사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단 살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모아놓은 돈이나 집 계약, 근무 일자 등을 정리하며 마무리하던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이 청담동을 보고 멋있다,라는 감탄이라니.


솔직히 말하면 별로 죽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삶에 욕심이 많다. 잘 살고 싶고 잘 지내고 싶었다. 자존심도 강했다. 사회에 나간 후 3년 동안 어른이라는 직장에서의 리더급들에게 당하고 농락당한 일들이 내 부족함이길 바랐다. 그게 아니라 그냥 나이만 들었던 늙은 사람들이 자식뻘인 내가 싫어서 모든 것을 일으키고 짓밟은 거라면 누굴 의지해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처로 못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기 싫었다.



나의 인생이 상수함수라는 실감이 들었다. 어떻게 해도 리더급들의 사람들은 날 싫어하고 내 인생에 조금이라도 훼방을 놓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남들이 브런치든 트위터든 인스타든 유튜브든 '나도 이렇게 힘들었어요.'에 드는 예시들은 너무나도 부러운 것들뿐이었다. 나는 서류 50개 모두 한두 달 만에 탈락했고 오픽시험은 10번째 공부를 하나마나 똑같은 점수였으며 30대가 되어가지만 결국 모은 돈도 없이 족같은 욕만 듣다가 신입 취준을 하고 있다. 이제 11월이다.



내년이 그려지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다. 내년에 나는 여기 없을 거니까. 어차피 안 되는 인생이라면 숨을 쉬는 게 마이너스였다. 내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은 잘 모르겠고 곤란해질 사람들은 있겠지. 그 곤란할 것들이 넘어가면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모은 돈을 정리하고 누구에게 얼마를 송금해야 하는지 마지막에 무엇을 해야 할지 집 계약은 언제까지인지 무엇을 써야 할지를 찾아보는데, 젠장 죽는 것도 어렵더라. 왜냐면 죽고 싶지 않았기에 죽는 방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저 뭔가를 해도 안 좋은 결과만 나오니까 이제 의욕을 잃어버렸을 뿐이었다. 내가 왜 죽어야 하냐. 그렇게 심리상담을 신청했고, 복약을 늘렸다. 이런 생각이 들자 확신했다. 나는 살고 싶었다. 하지만 살 수가 없었다. 삶의 모든 요소들이 나를 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일단 잠깐 살기로 했다. 잠깐이라 함은, 언제 어떻게 사고든 뭐든 사람은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죽음을 보류한 10 계명을 잠깐 쓰자면,


1. 저 새끼들도 사는데 내가 왜


나를 괴롭힌 리더급의 높은 사람들, 인격모독 고용협박 채용취소 아이디어갈취... 그 늙은이들 모두 잘 살고 있다. 범죄급의 데미지를 내게 준 그들은 이제 50대이거나 넘었을 텐데 겨우 30년을 살아가는 내가 죽어야 한다니.


2. 나는 내가 창피하지 않다.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솔직히 딱히 숨길만한 취미도 없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보여줘도 별 타격이 없다. 그냥 우주의 기원 영상이나 명상법, 게임 실황, 먹방이나 세븐틴 영상이나 뜬다.

죽어야 마땅할 새끼들이 판치는데 별 거 없는 내가 왜.


3. 하고 싶은 게 있다.


좋은 것을 입히고 먹이고 운동을 해서 추구하는 스타일의 옷을 다시 입고 다니고 싶다. 나는 꽤 시-크 한 여성이었는데(겉보기에만) 타투도 하고 세미 정장을 입고 다시 다니고 싶다. 머리도 잘라보고 싶다. 좋은 직장이나 직업을 가져서 돈도 많이 벌고 가족들과 사치도 부리고 싶다.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싶다.


4. 그게 허세가 아니다.


나는 높은 목표를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열심히 해서 이뤄놓았던 것도 있고 스펙이나 경력, 경험, 능력치도 나름 쌓아놓았다. 다들 대기업만 가면 중견 중소기업은 누가가냐, 이런 것보다는 내가 다시 들어간 첫 직장이 큰 곳이 아니어도 좋은 곳을 바라는 게 허무맹랑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꽤, 세상에 도움이 될 녀석이다.


5. 계획만 하고 아직 못 이뤄낸 것이 있다.


이런저런 스터디, 사업, 콘텐츠, 인스타툰, 모두 정해놓았다. 하지만 못 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1년간의 쓰레기취급은 내게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머리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닌데 계속 취업이나 시험 성적이 안 나오는 데는 상태가 나빠진 탓도 있다(고 믿고 싶다.)


6.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이 있다.


내가 죽으면 곤란해할 사람들도 있지만, 나로 인해 울었던 사람들도 있다. 이런 말을 해놓고 사라져 버리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지 잘 모르겠다. 스스로를 쓸모의 영역으로만 보게 만든 작년의 리더들보다는 내게 소중하고 나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들을 위한 선택을 하고 싶다.


7. 나는 그들과 있고 싶다.


솔직히 나는 남들이 나를 소중히 여길지에 대한 자신은 없다. 제삼자를 어떻게 알 것인가. 하지만 나는 그들과 있고 싶다. 내가 죽어가도 인스타그램에 놀러 간 사진을 올리는 친구라고 해도 난 그 친구가 좋고 노가리를 까고 싶다. 시절 인연이기에 다음에 만날 새로운 좋은 사람들도 기대되고, 오래가고 싶은 가족 친구 지인이 있다.


8. 내가 없으면 사회나 세상이 손해 볼걸


나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다. 글을 쓰고 그림 그리면서 용기를 주고 얻고, 그리고 제법 잘할 줄 아는 게 무엇인지도 안다. 어디에 기여가 가능한지도 안다. 기여할 정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9. 가만히 있어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언제 억울한 끝이 생길지 모르는데 도망치고 싶어서 끝을 맞이하고 싶진 않다.


10. 다시 말한다, 나는 죽기 싫다.


살 방법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죽는 하루를 미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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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치 않게 어려운 글이 되었다. 이 이후의 글들은 그냥 내가 어떻게 우울증 불안장애 트라우마, 좃같은 사회생활과 전혀 안 풀리는 일들 사이에서 그럼에도 눈치 없이 살아가는지 얘기해보려고 한다. 형식은... 내 마음대로 할 거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너무 글이랑 그림을 미뤄서 억지로 1주일에 한 번이라도 그리고 글 쓰려고 만들었다.

목요일인 이유는, 별거 없다. 난 목요일이 제일 좋아서. 애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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