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해서 자존감 높히지 말자.
“태어나서 죽기밖에 더 하겠어?”
살벌한 말이지만 나를 진정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오랜만에 날 담당했던 상담선생님께 인사도 드릴 겸, 작은 케이크를 사서 찾아뵈었다. 괜히 공짜 상담을 원하는 것 같아 보일까봐 내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고 말았다. 선생님은 그렇게 ‘재지 말라’고 하셨지만 이미 받은게 많은 내 입장에서는 그러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상담이 직업이신 분이니까 더 조심스러워졌지만 선생님과 얘기를 트자마자 바로 와라랄랄라하고 나는 하소연을 해 버리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병원을 찾아간 것, 상담을 한 것 모두 허사로 만들어버리는 거니까. 그리고 모든 걸 허사로 만들어버린 나를 내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괜찮다고 나는 괜찮다고. 그렇게 잠에 들기까지 잠에 들었다가 잠깐 깨서 다시 잠이 들때까지 계속, 계속 나를 달래는 건 정말 지치는 일이었다. 선생님을 뵙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머리는 이미 정리되었는데 마음이 그걸 따라가지 못했다. 지금까지 계속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나를 달래고 끊임없이 다시 정리하고 결론짓고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내가 뭘 더 해야할지 궁리하다가 맘 편히 잠을 자는 것 조차 못하는 나 자신이 뭣같아서 저주하고 미워했다. 마음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한다. 나는 머리가 정리되면 마음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따라갈거라고 믿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문제는 잠과 마음, 아마 살아가는 그 모든것들은 흘러가는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뭔가를 하려고 하니까 더 조급해지지요. 마음도, 잠도 그날은 그냥 그런거고 다음날은 어떻게 될 지 모르고 내가 이렇게 해야지,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멋대로 되는 거고 그게 굳어지면 습관이 되는 거고.
아리송하다. 말이 뭔가 다가올 듯 말듯하다. 그래도, 잠을 자야 제가 편해지고 몸도 편해지지 않나요? 잠을 자야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게 아닐까? 흠…하긴, 잘 잤을때는 한번도 잠을 자야지 같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상황이 닥쳤을 때 다가오는 불안, 불만, 아픔, 상처 등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나는 최악의 상황을 미리 당겨서 걱정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열심히 했지만 최악의 결과가 나오는 것을 몇변 겪고 나니까 그냥 살아가는 것에 질려버렸나보다. 그래서 그때, 내가 안 좋은 결과를 맞이했을 때 스스로가 너무 놀라지 않도록, 보호차원에서 미리 걱정했다. 침대에 누워서는 오늘 푹 자지 못하면 내일 힘들거라고 불안해하고, 지금 아프면 좀 있을 약속에서 괴로워할것을 걱정하고, 잘 쉬지 못하면 다시 힘든 나날들만 내 앞에 펼쳐질거라고. 이러다보니까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그냥 하는건데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하니까 괴로웠다. 무엇보다 이런 것을 걱정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 할 수 있는 거 다 해 봤는데 결국 거의 한달째 우울증에 잠도 못 자고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내가 원망스럽다.
과정에서 걱정했던 만큼, 결과가 어떻든 의외로 큰 타격은 없었다. 그래도 걱정해야 할 것 같았다. 잠을 자고 쉬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말 그대로 ‘과정이 좋아서’하는 일들마저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봐 과정이 힘들어졌다. 어느날은 곧 잘 시간인데 또 잠을 못 잘까봐 두려워하면서 또 찡그리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내 방에는 고2때 시험 끝나고 해방감에 4절지에 크게 그린 그림이 걸려져있었다. 하도 오래 걸려져있어서 벽지 같은 느낌에 별 감흥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그게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보아도 굉장히 내 맘에 드는 그림이다. 그런데 완성본을 들고 맘에 들어했던 기억은 희미하고 그림 그리는 내내 엄청 즐거웠던 기억만이 생생하다. 그때 나는 친구에게 마카를 빌렸었고, 캐릭터들의 간지(!)를 위해 멋진 옷들을 검색해서 디자인했으며, 캐릭터들의 두번째 간지(!)를 위해 붓펜으로 멋들어지게 효과도 냈었다. 그때는 타블렛도 뭣도 없었고, 인체비율이 어떻니 손을 잘 그리니마니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그 그림을 자세히 훑어보면 고칠 것들 투성이일텐데 보면 볼수록 맘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걸 할 수 없다. 그렇게 다시 밤마다 잠에 들지 못하고 나를 괴롭혔다. 머리로 깨달은 것과 마음의 상태의 그 간격이 내 능력때문인 것 같아서 나를 죽일듯이 미워했다. 마음,마음, 그놈의 마음, 머리가 과장이라면 사장이나 대장이라는 마음. 내가 진짜 뭘 원하는건가 뭐길래 이렇게 다 생각으로는 정리하고 결론을 냈음에도 누가 나를 죽일듯이 괴롭고 무서운걸까.
괜찮다고 달래는 것 마저 지치고 힘들다. 머리를 끊임없이 굴려봐도 괴롭다. 머리 쓰는 것도 짜증나고 다 싫다. 내가 뭐가 괜찮고 뭐가 안 괜찮은지 뭘 해야 하는지 다 짜증난다. 그래서 그냥 누워서 누워서 그 감정이 뭐든 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몸은 왜 아픈지, 잠이 오는데 누가 나를 못 자게 하는지 그냥 생각 자체를 포기했다. ‘왜’,’어떻게’가 아니라 ‘지금 어떤지’를 받아들였다.
나는 많은 것을 원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별 거 아니었다. 그냥 나를 놔두는 것. 뭔가 잘 안 될때 계속 내 탓을 하면서 원인분석을 하지 않는 것,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 잠이 안 와서 생각이 많아졌다고 내 탓을 하지 않고, 먹을거로 돈 많이 썼다고 한심해하지 않는 것. 내가 내 편이 될 정도로 힘이 없더라도 적어도 내 적이 되지 않는 것.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안 좋은 일들이 내 탓이라고 생각해서 미친듯이 머리를 굴려서 해결방법을 생각해내고 뭐라도 하려고 했었다.
이것을 알게 된 밤은 잘 잤지만, 그 다음 날은 또 다시 잘 못 자고 괴로운 생각만 하는 내가 한심해서 울었다. 그래, 이것도 결국 머리만 정리된 거겠지. 마음이 이를 따라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마법처럼 당장이라도 뾰로롱하고 내가 괜찮아지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해결될 문제였다. 아니, 꼭 해결을 해야 하는 ‘문제’인 걸까? 그냥 별 의미가 없는 상태가 아닐까.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핑계를 댈 필요도 없는 그런거다.
세상에는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게 많다. 내 마음가짐, 몸 상태, 습관들이 별로라 해도 자책하지 말자. 내가 할 수 없는 건 내 탓이 아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자. 좋은 상태가 아니라 해도 그게 뭐 세계적인 문제가 되진 않으니까. 훨씬 힘든 일들을 어찌어찌 잘 지나와서 나는 이곳에 있다. 그러니까 마음껏 불안해하고 화내고 짜증내자. 억지로 버티지 말고 무리해서 자신을 안심시키지도 말자. 그런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 머리 터질듯이 굴려서 원인을 잡을 에너지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그림그리거나 놀거나 맛있는 것을 먹는데 쓸 것이다. 나를 안심시키든 자책하든 나는 계속 나를 들볶았다. 그게 지친다. 뭐든간에 그냥 나를 가만히 두고 싶다. 에너지가 다시 찰 때까지,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보련다. 자아성찰이 좋다고 하지만 생각이 깊어지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아주 아프게 알았다.
그냥 녹아있으려고 한다. 태어나서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