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입이 엄마 입이야?”
목욕물을 따뜻하게 받아 두었다.
내 손으로는 딱 좋았다. 오히려 좀 미지근한가 싶었다.
그런데 아들은 발끝을 담그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뜨거워! 데었어!”
나는 본능처럼 말했다.
“뭐가 뜨거워?”
이 말, 자주 쓴다. 거의 습관처럼 튀어나온다.
그날만의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말이 부쩍 늘었다. 말대꾸도 따라 늘었다.
블록을 끼우다 안 맞는다고 짜증을 내며 집어던졌을 때, 나는 물었다.
“왜 그래?”
“블록이 안 끼워져.”
“그게 짜증낼 일이야?”
그때 아이가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내가 내 마음에 짜증이 났는데, 그럼 어떻게 해?”
잠깐, 말문이 막혔다.
말이 너무 또박또박 정곡을 찔렀다.
나는 조용히 물컵을 들고 방을 나왔다.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며칠 뒤, 평소 잘 먹던 김치를 뱉으며 아들이 말했다.
“너무 매워.”
또 그 말이 튀어나왔다.
“이게 뭐가 매워.”
그러자 아이가 바로 반격했다.
“내가 매워서 매운 건데, 왜 엄마가 안 맵다고 해?
내 입이 엄마 입이야?”
...또 졌다.
세 번째쯤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그땐 그냥 웃었다.
어느 날 아이가 그림책을 보며 낄낄대기에 물었다.
“그게 왜 웃겨?”
“나는 웃겨.”
딱 한 마디.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아이가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내 마음에 짜증이 났는데, 그럼 어떻게 해?’
‘내 입이 엄마 입이야?’
‘나는 웃겨.’
이건 단순한 말대꾸가 아니었다.
아이는 자기 감정과 감각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짜증 나면 짜증 난다고 말하고, 웃기면 웃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한다.
그건 감정의 기초공사다.
그런데 나는 자꾸 “그게 뭐가~”라는 말로
그 감정을 해석하고, 다시 계산하고, 잘라내곤 했다.
마치 감정의 삽질을 하던 아이 손에서 도구를 빼앗듯이.
감정과 감각은,
‘느끼고, 표현하고, 그게 맞다고 인정받는 순간’에 자라난다.
그게 ‘자기 신뢰’다.
그리고 이 신뢰는 세상을 건너는 중심축이 된다.
그 이후로 나는 순서를 바꿔보기로 했다.
“짜증났구나.”
“맵게 느껴졌구나.”
“그게 웃겼구나.”
인정 먼저, 안내는 나중에.
“그런데 블록을 던지는 건 위험해.”
“다음엔 말로 얘기하자.”
인정이 먼저인 이유는
그 한마디가 감정의 문을 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야 말할 수 있다.
부모의 권위는 그렇게 ‘강요’가 아니라 ‘신뢰’가 된다.
아이는 여전히 짜증도 내고, 울고, 웃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잠깐 멈춰서,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이 감정, 이 감각... 인정부터 하고,
방향은 나중에 세우자.’
그렇게만 해도,
우리는 지금 괜찮은 부모 쪽으로 조금씩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