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를 수 없는 나라

겨울에 읽고 쓰고 둔다

by NIL

짧은 독서, 긴 여백

『다다를 수 없는 나라』 / 크리스토프 바타유/ 김 화영 옮김/ 문학동네 /2021


짧은 독서

책장을 덮었다. 세 시간이 안 걸렸다. 숨 쉬듯 읽었다. 앙증맞은 고양이가 그려진 책갈피를 쓸 틈이 없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프랑스혁명이 한창이던 18세기말 베트남으로 떠난 선교사 일행의 이야기다. 제법 긴 기간의 기록인데 짧게 쓴 것이 많은 질문을 만든다. 글 자체가 짧게 끊어 쓰는 단문들로 건조하게 연결되어 여백이 많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선교사의 생애보다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끈적거리는 날씨와 녹색으로 펼쳐진 계단식 논. 익히 알고 있는 베트남의 풍경이다.


책 뒤편에 실린 옮긴이의 말이 특별한 감상을 강요한다. “만남을 찾아가는 망각의 여정”이라는 훌륭한 제목으로 펼쳐놓은 해설은 옮긴이의 생각에 독자를 가둬놓는다.

90년대 후반 파리, 원작을 만났던 날의 감동과 홀림에서 시작하여 번역하게 되기까지의 인연, 불충분하면서 신비감을 만드는 작가에 대한 정보, 대충 적어 놓은 베트남의 역사까지. 그리고 말한다.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서 배어 나오는 기이한 적요함,

희열에 가까울 만큼 해맑은 슬픔의 위력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희열에 가까운 해맑음도 어려운데 그것이 슬픔이라니. 그것을 느끼지 못한 독자는 그래서 슬프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이 작품을 발표했다는 작가는 어떤 인연으로 베트남 이야기를 쓰게 됐을까?

베트남에 가보았나, 지아라이 족과 대화해 보았나, 아니면 학교에서 만난 베트남 친구의 이야기, 도서관에서 찾은 선교사들의 기록이 단서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프랑스혁명과 베트남 왕국의 역사는 제대로 반영했나. 문학적 감수성이 부족한 독자는 한 뼘 더 친절한 서사를 원한다.


베트남이라는 무인도

작품의 배경이 되는 베트남의 역할은 무인도나 다름없다. 일단의 선교사를 파견하는 목적지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지상 낙원이나 자원의 보고, 문명 발상지 뭐 그런 수식 없는 머나먼 나라일 뿐.


1년에 걸친 항해 끝에 베트남에 도착했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예상과 다르다. 예를 들면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이었다면 여기서 원주민과의 갈등이 나와야 한다. 팽창적 제국의 앞잡이들, 헌신적으로 선교활동에 임하다 끝내 순교하는 수도사와 잔악한 침략자들에 의해 학살되고 빼앗기는 사람들. 그렇게 흘러야 한다.

하지만 프랑스 원정대는 그렇지 않았다. 도시를 점령하러 떠났던 군인들은 몰살당하고 마을에 남았던 선교사들은 농사꾼이 되었다. 베트남의 자연과 날씨만 있다. 사람들은 자연처럼 존재한다. 열심히 땀 흘리며 농사짓는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정착했다. 그것을 성공적인 포교활동이라 여기고 북쪽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우여곡절 끝에 북쪽의 고립된 마을에 도착한 카트린과 도미니크, 두 사람이 얻은 것은 마음의 평화, 지독한 고독을 뛰어넘어 당도한 이해와 사랑이었다. 예상하기 힘들었던 해피엔딩이다. 무인도에 들어갔지만, 친절한 자연의 배려 속에 사랑을 나누며 살다 함께 죽은 남녀의 이야기이다. 혁명과 내전의 틈바구니에서 이미 프랑스와 교단으로으로부터 잊힌 존재였던 카트린과 도미니크에게 이만한 평안이 어디 있겠는가. 국가와 종교의 규범을 내려놓고, 예배도 드리지 않고 정기적인 기도나 교리문답도 하지 않았지만 가장 순수한 인간으로 살았다. 그들이 베트남에 온 목적은 사라졌지만 평화와 자유를 사랑했던 그들은 묘비에 그 마음을 남겼다.


”우리의 하느님과 프랑스를 위하여 “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이 작품의 원제목은 ”안남“이다. 번역하면서 ”다다를 수 없는 나라”로 제목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어딘가 단서가 있는데 놓친 것이 있을까. 도미니크가 가고 싶었던 나라를 말한 적이 있나. 새삼 질문을 하지만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작품에 등장하는 두 나라 - 프랑스와 베트남 –는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수도사의 관점에서 만들고 싶었던 나라, 가톨릭으로 개화된 베트남인가. 그것을 넘는 이상적인 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렇게 정의한다면 그들은 죽음으로 거기에 다다른 것은 아닐까.


그는 혼자 남아 살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 다 평화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들은 행복했다.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 그들이 다다른 나라는 더 명확해진다. 백인 선교사를 찾아 마을에 쳐들어온 군인들이 목격한 장면. 어느 한구석에서도 서양 냄새가 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베트남의 자연 일부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 문장만으로 이 작품을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을 했던 것이다.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떠났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나지만 이 작품을 떠나지 못한다. 베트남으로 떠났던 원정대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두 사람이 신부와 수녀라는 껍질을 내려놓고 남자와 여자, 인간이자 자연으로 살다 간 이야기는 사랑으로 마무리한다. 훗날 그들의 흔적을 찾은 프랑스 군종 신부가 묘지의 십자가를 부러뜨리며 망각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고독이, 그것을 극복해 가는 사람이 슬프다. 짧은 문장 사이 쌓인 여백만큼.

여백이 길어지면서 앞에서 던졌던 모든 질문을 회수하게 된다. 프랑스와 베트남의 역사를 몰라도 된다. 당대 선교사들의 활약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더 자세한 서사는 필요하지 않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처음 생각했던 미션도 별 의미를 갖지 않게 된 순간, 그들이 보통의 남자와 여자로서 돌아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베트남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원주민들을 교화시키고 포교했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친절한 원주민들의 배려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이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그 안에서 평화를 찾은 힘이었다.


프랑스에서 죽은 베트남의 어린 황제, 힘든 출발과 배 안에서 죽어 간 일행들, 전염병과 고독, 혁명의 와중에 잊혀진 기록, 죽음으로 따라붙는 내전. 그렇게 나열되는 죽음 앞에서 그들이 프랑스인이거나 베트남인이거나, 여자든 남자든, 신부이든 농부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험한 항해 후 다다른 나라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간으로서 사랑받고 서로 기댈 수 있는 나라였다. 여백은 질문을 만들고 생각이 길어지는 작품이다.

keyword
이전 13화타타르인의 사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