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읽고 쓰고 둔다
문득 그런 날이 온다.
『타타르인의 사막』 / 디노 부차티/ 한 리나 옮김/ 문학동네 / 2021
그렇게 춥기만 한 겨울날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속에 머물며 연차를 쓰고 싶은 유혹과 싸우다가 모두 떨쳐내고 버스에 오른다.
마포 대교를 지날 때쯤 숨을 고르고, 흐르는 듯 멈춘 한강을 바라본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내가 하는 일은 즐거운가? 한 발 더 나가 내 인생에 원하는 성공은 무엇일까?
꼬리를 물고 떠오른 질문을 허공으로 띄어보내며 오늘 해야 할 일을 구상한다. 새로운 프로젝트 계획서를 멋지게 마무리하고 예산 계획까지 촘촘하게 수립하여 결재받아 내리라, 하루를 계획하다 보면 버틸만한 보람이 있는 시간에 대한 희망으로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렇지만, 저녁 아니 늦은 밤 다시 마포 대교를 건너 돌아오는 길에는 어깨가 처져있다.
지난 실적을 정리하라는 팀장의 지시로 프로젝트 계획서는 미뤄지고, 장표만 들여다보다 숫자 폭탄에 눌린 허리도 펴지 못하고 엉거주춤 내려다보는 강물은 아침 그대로다. 이미 지난 날의 실적, 죽은 숫자를 정리하는 것이 뭔 의미인가.
나의 하루, 나의 시간을 내 맘대로 쓸 수 없을 바에는 저 강 상류에 있는 저수지나 댐을 관리하는 일을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한적한 산골의 저수지를 자전거 타고 순찰하고 물의 수위를 측정하고 기록하다가 비가 많이 오면 수문이나 한번 열고, 가끔 방문하는 본부 사람과 밥먹으면 되지 않을까. 남는 시간은 낚시나 하고 넷플릭스나 보고. 실제 그 일을 하는 분들이 들으면 화낼 상상을 하며 혼자만의 도피를 꿈꾼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다시 출근한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 된다는 각오를 써 놓고 일하라는 자기계발서의 한 대목을 기억하면서 지금 말하는 사람과 다른 역량의 팀장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키운다. 회의가 끝나면 그날 맡겨진 일을 한다. 그렇게 정년과 은퇴를 향해 달려간다. 그러다 문득 그런 날이 온다.
“불쌍한 드로고”
이탈리아 작가 디노 부차티의 작품 『타타르인의 사막』은 그렇게 살아간 사람, 조반니 드로고의 인생 기록이다. 사관 학교를 마치고 군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성공에 대한 포부를 갖고 첫 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에 왔던 드로고가 평생 떠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이다. 도시를 떠나 고립된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목적은 언젠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군에 대한 대비였다.한 없이 펼쳐진 평원과 사막 너머에 있다는 적군은 실체를 제대로 본 적도 없고,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정찰과 경계뿐인 군대의 일상은 드로고를 지치게 한다. 처음 도착한 날부터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행할 의지는 없다. 반복되는 근무와 요새의 일상에 익숙해지고 오로지 적이 쳐들어와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된다.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드디어 적군이 나타나고 본국의 지원군이 파견되며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었을 때, 늙고 병든 드로고는 요새에서 퇴출당한다. 새로 오는 지원군의 장교들을 위해 공간을 내주어야 했다. 부대를 떠나 당도한 마을의 여관에서 교차하는 군인들과 삶의 목적지를 찾은 사람들을 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불쌍한 드로고.”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무엇보다 세상에 자신이 혼자이며,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그는 깨달았다.
요새는 지키는 곳이다.
처음부터 드로고의 선택은 문제였다. 성공한 군인이 되고 싶었다면 가장 확실하게 요새를 떠나야 했다. 요새에서의 삶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다른 의미를 찾아야 했다. 오지도 않는 적만 기다리지 말고 주변 사람들과 더 적극적으로 교류하거나 체력 단련 같은 것을 하며 자신을 지켜야 했다. 동년배인 시오메니가 사령관이 되어 팔팔한데 혼자 진급도 못 하고 늙고 지치고 병든 데는 축적된 문제가 있다.
요새 주둔 병력을 줄이고, 새로운 근무 시스템으로 교체되는 동안 드로고가 적극적으로 한 일은 무엇일까. 그냥 떠나가는 사람에 대한 미련이나 새로 온 장교에 대한 안타까움. 애초부터 요새의 역할과 자신의 포지션을 착각했다. 요새는 처음부터 지키는 곳이다. 최소한의 병력만 주둔하고 경계하며 유사시 주력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곳이다. 전쟁이 난나고 해서 그가 공을 세울 여지는 없다. 그의 전임자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냥 전쟁이 일어났다면, 전쟁에서는 활약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자기 위안일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요새를 떠나는 것에 대한 회피 전술이다.
드로고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회피한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여관에서 죽을 결심을 한다. 그것이 군인다운 죽음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죽음과의 싸움이 자신의 마지막 전투라 정의한다.
어둠에 둘러싸인 조반니 드로고는 자신의 내면에서 마지막 희망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홀로 남아 병들고 요새에서 버려진 남자, 모두에게서 뒤처진 소심하고 쇠약한 그 남자는,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라고 용기 내 상상했다.
어쩌면 일생일대의 기회,
그의 전 생애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결정적인 전투가 정말로 닥친 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그의 마지막 전투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죽음을 이기는 인간은 없다. 그가 평생을 기다려 온 적이 타타르인이 아니고 죽음이라고 억지를 부린다면 현재를 더 열심히 살아야 했다. 스스로 반성한 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시간에 관한 이야기
요새에 고립되어 적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군인은 이야기를 장장 30장에 걸쳐 기술했다. 작가 디노 부차티는 별 사건도 없이 한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며 펼쳐진 시간들을 묘사한다. 끝없이 황량한 평원과 사막, 낮과 밤, 여러 계절을 거쳐 나타나는 드로고의 심리 변화를 절묘한 표현으로 전달한다. 처음 요새로 오면서 드로고가 느끼는 감정-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나는 순간부터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산길을 지키는 공허한 시간,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따라오는 회한, 그럼에도 떠나지 못하는 저마다의 이유. 마지막에 무너지는 믿음과 고독한 시간까지. 드로고와 요새 사람들을 따라가며 그들이 느끼는 막연한 공포의 저변에는 시간의 흐름이 있음을 보여 준다.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결정적 순간들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서술이 드로고의 인생과는 다른 울림을 만들곤 한다.
그래도 시간의 조용한 박동은 점점 더 빨리 사람의 운율을 재촉하며 흘러갔다.
잠시도 멈춰있지 못할 뿐 아니라 뒤를 흘낏 쳐다볼 새도 없었다.
누군가 괴로워할 때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 해도 그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지는 않으며,
바로 여기서 삶이 고독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포 대교를 건너고 있는 그렇고 그런 날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