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시간 (가을에서 겨울 지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 재룡 옮김, 민음사, 2022년
단상 1.
“우연히 여자랑 모텔에 가게 되더라도 절대 아침에 해장국은 같이 먹지 마. 그 순간, 네 인생은 꼬이는 거야”
대학 초년생 시절, 복학생 선배와 아침 먹다가 들은 이야기다. 그 선배와 밤새 술을 먹고 해장을 하다 갑자기 던진 선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고, 경험도 없었다. 이후로 그 선배를 생각하면 항상 농담처럼 지나간 그 말이 떠올랐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해서 먹고살고 있는지.
그 선배는 토마시를 닮았다. 토마시는 생각나는 대로 행동한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에 대해 자기만의 논리를 준비한다. 그것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반복되는 일상일 뿐이다. 자신의 사명이나 책임 같은 것은 도외시하고 살았음에도 군중과는 떨어져 있던 사람. 어쩌다 자신의 규칙을 어기고 한 여자에 대한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6번의 우연이 중첩되며 운명이 되었다.
단상 2.
자신의 생활이 불편해지면 환경을 바꾸는 여자들이 있다.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연히 만난 남자의 명함 한 장만을 들고 도시로 나온 테레자. 소련군의 침공에 대한 분노로 찍은 사진들이 시위 참가자들을 찾아내는 도구로 쓰이는 부조리한 현실에 낙담하여 스위스로 망명한다. 거기에서도 온전한 사랑과 행복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다시 프라하로, 시골 마을로 계속 환경을 바꿔 나가며 갖고 싶은 것. 토마시에 대한 독점적 사랑을 얻고자 한다. 그렇게 얻은 잠시의 평화 속에 편안히 잠드는 날이 왔기를.
반대로 사비나는 혼자다. 그녀는 항상 배신을 꿈꾼다. 누군가 자신의 곁에 정착해 주길 바라는 시점이 그녀가 배신을 실행하는 시점이다. 자신을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예술가로 지칭하는 것조차 거부하며 인간의 허위의식을 못 마땅해하는 그녀가 안식을 찾을 곳은 없고, 그냥 더 멀리 떠나고 계속 그렇게 살아남았다.
모든 사건이 정리되는 6부 대장정에 등장하는 ‘키치’라는 개념에 가장 접근한 인물이다. 그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사비나가 살아낸 시간과 가장 맞닿아 있다.
단상 3.
작가는 인물을 창조한다. 이 책은 총 7부로 구성되었는데, 각 부의 주인공이 다르다. 토마시라는 한 남자의 생애를 따라가며 철학과 종교, 정치와 섹스 이야기를 늘어놓는 듯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토마시의 일생은 아니다. 작가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해설하면서 자기 생각을 펼친다. 4명의 주요 등장인물은 그렇게 작가가 가진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 니체와 플라톤, 오이디푸스와 스탈린의 아들까지 어지럽게 등장하는 철학과 전설, 신화가 된 이야기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게 한다. 이 작품에 붙여진 엄청난 찬사와 노벨상 수상 기록까지. 부담 없이 읽기 힘들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프란츠였던 내가 사비나가 되기도 하고, 토마시가 되기도 한다. 그들처럼 독자도 성장한다.
단상 4.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프라하의 봄' 한글 제목을 그렇게 붙인 이유는 뭘까.
스토리만 따라가면 아침드라마 못지않은 막장인 데다가 지나치게 잘 생긴 영국 남자와 프랑스 여자 배우, 끝없는 성애 장면을 마케팅 포인트로 하면서. 당시 가장 예민했던 정치 단어, 프라하의 봄이 제목이라니.
어쩌면 인생이란 한 번 지나가는 봄날처럼 짧은 순간 이란 의미인가. 그러면 원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어떤 의미인가. 그렇게 짧게 지나가는 삶, 존재 자체를 참을 수 없으니 가볍게 살라는 것일까. 존재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참을 수 없으니 무겁게 살라는 것일까.
영리한 개 카레린의 죽음까지도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기껏 빵 쪼가리 가지고 장난치면서 자신을 위로한다고 생각하는 한심한 인간들. 뭐 그리 복잡하게 사는 척하지 말라고 보내는 미소, 스토리와 인물보다는 이미지로 기억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