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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Feb 14. 2024

그 남자를 만났다.

하늘 정원

   금요일 오후의 호텔 로비.

   컨시어지 데스크에서 김세안 대표 면담을 요청하자 로비에서 기다려 달라는 대답이 왔다. 성원은 마음을 추스리며 호텔 로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겉에서 보기보단 큰 규모의 공간, 높은 천장, 단정한 인테리어와 벽에 걸린 낯익은 명화. 그리고 의외로 적은 손님들. 직원들은 각자의 포스트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반면, 고객수는 많지 않았다. 데스크에서 체크인하는 사람이 두 명, 라운지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 두 팀, 그리고 성원처럼 멀쩡거리며 서 있는 사람 2명,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연회장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엘리베이터 앞에 몇 명, 그것이 전부였다.

  

   송안시에 내려오고 백화점에 다니게 되면서 호텔이 생긴 걸 알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여기에는 작은 건물 몇 개가 있었다. 서점이 있었고, 스크린이 세 개인 극장도 있었다. 그리고 시청 사람들이 자주 찾는 생태탕집과 아버지가 좋아하던 중국집, 그런 가게들이 몇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와 보니 모두 사라지고 커다란 호텔이 생겼다. 친척 누구의 결혼식이 있어서 가보고, 백화점 회식 때 뷔페 식당이나 지하 노래 주점에 가본 적이 있긴 하지만 성원의 일상 생활과는 동떨어진 건물이었다. 이렇게 대표를 만나러 오게 될 줄이야.


 "오래 기다리지 않았지요?"

  라운지 한쪽 구석 테이블에 자리하며 김 세안이 먼저 물었다.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음료를 주문했다.

 "사무실로 올라 오라 그러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내려온다고 했지요. 우리 만나고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 보고 싶었어요?. 전화를 하면 내가 갈텐데 일부러 오다니. 그럼. 어디 가서 저녁이라도 먹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온 것은."

  성원은 간결하게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백화점 오픈을 축하하기 위한 vip 파티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 파티에 오셔서 vip 고객들에게 드림백화점을 사랑해 달라 말해달라는 부탁, 그리고 이런 말을 전하기 위해 골드의 김기도 사장과 드림의 정규식 상무가 만났으면 한다는 전달까지. 공적인 목적을 가진 방문임을 설명하고 파티 초청장을 내밀었다.


 "그런 이유라면 좀 더 높은 사람이 왔어야 하는 것 이닌가? 일개 대리를 보내 초청하다니, 우리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군요. 더구나 그쪽 회장님이 지시했다면 좀 더 격식을 갖춰서 초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아서. 현재 남아있는 골드 출신 직원 중에 제가 그나마 직급이 높은 편이라서,

  제가 기획실 출신이라 부사장님과 인연이 있다고 저를 보낸 것이지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무시하거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화가 난 듯한 세안의 반응에 놀라고 당황하여 성원은 더듬거렸다. 뭔가 더 변명할 말을 찾으면서도 방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것이 더 필요할까 생각했다. 오늘 확답을 듣지 못해도 김사장 미팅 약속 정도는 받아가야 한다. 하지만 현재 분위기는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흠. 그렇다면 과장급 이상 직원은 다 잘랐다는 소문이 사실이군요. 고용 승계 약속하고 3주 만에 직원들을   다 자르다니. 그 소행도 괘씸한데 지금 파티에나 와서 광대 노릇하라는 겁니까."

"아니, 자른 것은 아니고 스스로 그만둔 겁니다. 본사나 다른 점포로 발령 난 직원들도 있고."

"허허, 민대리 말하는 걸 보니. 이젠 드림 그룹 직원이네요. 앞잡이가 되었네요. 일은 할 만합니까. 본인 업무

  상관없는 이런 심부름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인가요. 드립의 앞잡이로"

   

   이 남자가 이상했다. 세상 아무것에도 관심 없고 특히 회사 일엔 감정도 없던 사람이 이 정도면, 많이 화내고 예민하게 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무심하게 살다가 이제 남주고 나니까 아까운 것인가. 성원도 살살 짜증이 올라왔다. 이렇게 대놓고 무시해도 되는 건가.


"제가 심부름을 다니던 허드렛일을 하든 말든 그건 부사장님이 관여하실 일이 아니고요. 제가 드림의 앞잡이가 된 것이 아니라, 저는 골드 시절이나 지금이나 한 명의 직장인으로서 주어진 일을 할 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부사장님은 골드의 오너였지만,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월급 받고 일하는 고용인입니다."

"뭐 어쨌든. 내 생각에는 이건 민대리 일이 아니요. 내가 이렇게 화를 내더라고 새로 팀장에게 전해요.

 하긴. 내가 보고 싶어서 자원해서 왔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화낼 일도 아니고"

 모든 긴장과 스트레스가 특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남자 이게 모야. 원하는 말이 이거였나. 말은 못 하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어느새 그는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앞에 놓인 커피잔을 돌리며 말간 눈동자로 성원을 바라보았다.


"이라 나이틀리라는 배우 알아요?"

"그건 왜 갑자기. 알긴 압니다만. 오만과 편견이랑, 거 뭐냐 비긴 어게인."

"닮았어요!"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것인지. 한창 파티 초대와 성원의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이 느닷없이 영화배우를 들먹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리둥절한데 그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유학 시절. 별로 할 일도 없고 노는 것도 지치고 했을 때  혼자 영화를 보는데, 그 배우가 나오는 거예요. 근데 딱 누구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도 비슷한 거 같고. 송안에 사는 사람."

"그게 누군데요?"

분노하던 성원은 다시 그 이야기에 넘어가고 있었다. 항상 세안의 화제 전환에 따라가며 당한다는 느낌도 있지만 답을 알고 싶은 충동을 멈출 수 없었다.


"하하. 송안 살고 그 또래에 내가 아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어요. 고등학생 때 우연히 한번 본 농장 소녀."

 그날 이후 그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가 백화점 사무실로 걸어 들어오던 그 순간까지. 그날 이후 성원은 그의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않고 살았다. 며칠 전 인아가 이야기해서 그날의 기억을 떠 올렸고 지난주 그와 함께

농장의 아지트를 방문하면서 그에게도 그날의 기억이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먼 이국 땅에서 그 나라 영화를 보면서 한국의 농장 소녀를 기억하디니.


"내가 민대리를 좋아했거나 그리워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냥 키 크고 마른 체격에  뭔가 열심히 말을 하는데 딴생각을 하는 듯한 눈빛을 가진 그런 모습이 닮았다고 할까."

"말하면서 눈으로는 딴생각을 한다고요?"

"그 배우가 약간 그런 면이 있었어요. 그때는 소녀 티가 남아있을 때 였는데 또박또박 따지듯 말하지만  항상 눈빛은 사랑스럽다 할까."

"저는 그런 거 못 느꼈는데."

"요즘은 그 배우도 조금 변한 것 같더라고. 배역 탓인지 모르지만. 고집이 늘었다고 할까. 말도 세지고."

"한 번 봐야겠군요. 최근엔 영화를 통 안 봐서."


"근데.. 민대리는 내가 누구 닮았다는 생각 한 적 없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마시려던 커피를 다시 내려놓았다. 대답을 원하는 것인지 그냥 할 말이 없어하는 말인지 그 의 얼굴을 다시 또렷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스스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죄송하지만. 제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부사장님을 많이 보질 않아서."

"그렇지. 민대리야 워낙 바쁘니까."

성원이 하려던 말은 그만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인데, 세안이 말을 잘라 버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김사장에게 오늘 미팅 내용을 전하고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말로 회담은 끝났다. 순식간에 정리가 되자 오히려 성원이 심란했다. 이제 일어나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뭔가 딱히 더 할 말은 없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업무 끝났으면 같이 저녁 먹고 갈래요. 우리 이태리 식당 파스타 맛있는데."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아직 업무 시간이라."

"하긴 좀 이르긴 하지. 금요일이라 예약이 많을 텐데. 내가 자리 빼놓을 테니 이따 퇴근하고 올래요."

"저녁 약속이 있어서."

"그럼 다 데리고 와요. 몇 명인지. 네 명, 다섯 명 아 내가 모르는 사람들인가. 드림백화점 직원들"

  세안이 말이 많았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 호텔이 홈그라운드라서 그런가. 아니면 사무실에만 처박혀 있어서 사람들을 못 만났다. 그건 예전에도 그랬다. 하루 종일 몇 마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만남은 오늘이 세 번째. 그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더 바라보다가는 저녁을 먹게 될 것 같아서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쨌든 민대리가 새로운 업무에 잘 적응하고 잘 버티는 것 같아 좋아요. 언제든지 내가 필요하면 연락해요.

  오늘처럼 직접 찾아와도 되고, 개인적인 일도 괜찮고,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나도 기쁠 겁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 돌아서다가 엉뚱한 말을 해 버렸다.

"월요일에 제가 농장 아지트 좀 써도 되나요. 백화점 쉬는 날이라 인아랑 호수에 산책 가기로 했는데."

"물론이죠. 거기 출입문 비밀 번호는 민대리 생일입니다."


  그건 성원이 설정한 번호였다. 그 후로 아무도 바꾸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근데 번호를 안 바꾼 것은 좋은데 그것이 성원의 생일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누군가 분명히 말한 사람이 있을 텐데, 그 번호를 아는 사람은 가족뿐이고 가족 중에 남은 사람은 엄마뿐이다. 그렇게 강여사는 성원의 주위를 맴돌고 있군 생각하며 벗어날 수 없으므로 포기하기로 했다.


근데 김 세안은 어디까지 들어와 있는건지 거기도 포기해야 하나.

오늘 방문의 목적이 마지막에 갑자기 변했다. 왜 월요일에 거기 간다고 했지.계획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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