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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Feb 07. 2024

시련은 계속된다.

하늘 정원

 "민대리 어머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번 경로잔치가 이렇게 잘 치를 수 없었을 거야."

   김 부장과 권차장이 강여사를 찾아와 마을잔치에 대한 아이디어와 관련 자료와 사진들을 수집해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원은 배신감을 느꼈다. 김 부장의 경로잔치 기획을 보면서도 유람선이나 옛날 사진 슬라이드는 내 담당이 아니구나 생각했을 뿐 내 집에 내통자가 있어 그런 아이디어를 조달하고 있는 줄 몰랐다. 오히려 행사 당일에 VIP 의전 담당이므로 오전에 잠깐 일하면 끝이란 것만으로 안도했다. 사무실에 할 일도 많은데, 마을 잔치에 막걸리 마시고 노래 부르는 들러리로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그런데 막상 권 차장을 만나 엄마에 대한 감사의 말을 듣고 행사의 목적을 이해하니 적극적으로 도왔어야 했나 생각 들었다. 백화점의 중요한 행사이고 함께하면서 배울 것도 많았을 것이란 권차장이 설득력 있었다.

"이제 사무실에 들어갈 거죠. 회장님은 여기서 바로 서울로 돌아가실 겁니다. 내가 모시고."

"백화점에 안 들리시나요. 그럼 제 임무도 여기서 끝이군요. 근데 차장님 오늘 굉장히 낯설어요."

"아쉽네요. 민대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벌서 헤어져야 한다니."

"훟. 차장님. 가신지 일주일도 안되었걸랑요.근데 벌써 변하신것 같아요"

 

   짓궂게 코를 찡긋하며 말하는 성원의 표정에 놀란 것은 권 차장이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 오늘 경로잔치에 불려 나온 것이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이었나. 이제 해방된다는 것이 정말 즐거워 저러나. 성원도 자신의 행동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권차장의 등장은 예상외로 반갑고 설래게 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 문화센터 문제를 얼마나 능숙하게 처리했는지도 자랑하고 싶었다. 혼자서도 일을 잘하고 있다고. 여기서 만났으니 당연히 백화점에 가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했는데, 그냥 간다니 왠지 섭섭하여 이상한 표정이 나왔다. 어쨌든 분위기를 수습하고 빠르게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서는 권새록 팀장과 황인아 매니저가 vip파티 계획을 점검중이었다.인아가 초청 대상 고객에 대해 뭔가 말을 시작하자 성원은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데 하는 표정으로 인아를 노려보았다. 문화센터 이후로 담당이 아닌 일에 끌려들어가기 싫다는 성가심의 분출이었다. 성원의 상태를 눈치챈 인아가 말머리를 돌렸다.


"물론, 초청장은 내일 발송할 건데. 내가 하려던 얘기는 너희 엄마 강여사님도 초정 대상에 넣었다는 거야."

"울 엄마. 백화점도 잘 안 오는데 왜, 특히 VIP 파티라 하면 여편네들 모여 노는 꼴 보기싫다고 질색할텐데." 

"백화점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요?"

 옆에서 고객 리스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권새록 팀장이 말했다.

"정말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백화점 싫어하는 여자 없어요. 쇼핑은 낭비고 충동 구매는 죄악이라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게 백화점의 전부는 아니죠.스트레스 해소하고, 정보 수집하고. 삶의 활력이

  될 수도 있죠."


"우리 엄마, 진짜 싫어하는데. 더구나 파티라고 하면 절대 안 온다고 하실 거예요." 

"하여간 딸들이 자기 엄마를 젤 몰라요. 백화점 오면 생각이 많아지니까 잘 안 오시는 거잖아요. 백화점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자기 딸이 다니는 곳이라 말도 못하고 참아야 해서 안 오시는 거라니까요.

 경로잔치 기획하신 거 보면 몰라요. 엄마 마음을."

"들어도 알 수 없는 말이네요. 엄마가 딸 생각하는 마음과 백화점이 무슨 상관인가요."

"못 알아들으면 그만하고. 파티에 입을 옷 걱정은 마시라 해요. 내가 미용실이랑 다 예약해 놓는다고,

 당일 날 일찍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드려 주세요."

"누구한테?"

"정말 민대리, 자기 일에는 멍충이가 되나 일부러 저러는 건가.당일 날 아침에 엄마 모시고 내가 지정하는

 미용실 가라고. 그날 파티의 주인공 만들어 드릴 테니 내가 준비한 데로 따르기만 하라고요."

  권 팀장이 압도적 표정으로 성원을 압박하다가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전화를 받으며 잠시 떨어지자, 성원과 인아는 서로 쳐다보며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새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를 초대한 건 권 팀장이고, 당일 날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 놓았다 이거지."

 "그래. 나는 여기서 진행하느라 뺑이치고 너는 엄마 모시고 공주 놀이하고."

 "웬 공주?"

 "권팀장 말하는 걸로는 엄마를 여왕 만들 것 같은데, 여왕 딸은 공주잖아."

 "... ..."

  

   성원이 잠시 말을 띄었다. 오전에 만난 권 차장은 남몰래 내통하여 마을 경로잔치에 엄마를 끌어들였고, 오후에 만난 권팀장은 VIP도 아닌 엄마를 제 밈대로 초청하고 한발 더 나가 파티의 주인공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권씨 남매의 소행이 갑자기 괘씸해졌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 정작 친딸인 자신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거지. 인아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엄마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권팀장이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 바람에 불평할 타이밍을 놓쳤다.


"김 부장님 전화인데요.이번 파티에 골드 백화점 오너를 초대하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있었답니다."

"갑자기, 왜?, 진작 말씀하시지. 봉투 인쇄도 끝났는데."

"경로잔치에때 마을 주민들이 골드의 김사장 일가가 그동안 지역사회에 좋은 일 많이했다고 칭찬하셨데요.   그러니까 회장님도 생각하신 거죠. 일종의 VIP 고객들을 인수인계하는 모습을"

"근데 초대한다고 오실까요. 기분 좋은 일도 아니고. 빼앗긴 들에 꽃피는 것 보고 싶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회장님 지시니까. 초청은 해야죠."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어쨌든 VIP 초대 파티이고 김사장 일가가 올린 매출만으로도 VIP 자격은 충분하다. 처음 초청 대상리스트에 김사장 사모님이 있는 것을 보고 명단에서 제외시킨 것은 권팀장이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도 당연히 안 올 것이고 초청장을 보면 괜히 기분 나쁠 것 같았다. 인아는 좋은 방법이 생각났지만 성원의 눈치만 봤다. 다른 고객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려면 김사장이나 그 아들이 와야 한다. 사모님이 오는 것은 옳지 않다. 골드 백화점의 경영진이 참석하여 고객들에게 인사하고 새로운 드림백화점의 성공을 당부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편으로 초청장을 보내는 것으론 부족하다.직접 찾아가 설득해야 한다. 배경을 설명하고 역할을 알려줘야 한다. 점장인 정규식 상무가 직접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점장님도 아시나요. 회장님이 지시하셨으면 점장님이 직접 나서서."

인아가 말꼬리를 흐리자 권팀장도 고객을 끄덕이며 김 부장이 따로 보고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딜수도 없고. 점장실에 한번 들어가 보시죠."

인아는 무조건 빨리 진행하고 싶었다. 어쨌든 정상무가 나서길 기다리며 망설이던 의견을 내놨다.

"일단, 여기 민대리가 김세안 부사장을 먼저 만나서 분위기를 잡으면 어떨까요."  

"아니, 내가 왜?. 김 부사장님이 왜 나오는건데?"

"일단 너하고 김부사장하고 친하잖아. 스카이 다이빙도 같이하고."

"지난 주말에 같이 갔다는 사람이 골드의 김부사장이었어요. 진작 말하지 그 정도라면 한시름 놓았네요.

 적어도 우리 생각을 오해 없이 전달할 수는 있겠네요."

'아닙니다. 안 친해요. 그냥 이전에 저희 팀장님이셨기 때문에."

 

  부정하고 설명하려 하지만 딱히 설명이 안되는 관계였다. 권팀장의 표정은 밝아졌다. 어쨌든 오너 일가와의 연결 고리를 찾아낸 것이다. 그들이 것이냐는 두고 봐야겠지만 적어도 조금 가능성을 높일 수는 있겠다 싶었다. 일단 다음 날, 성원이 초청장을 들고 김부사장이 있는 트라이엄프 호텔로 찾아가는 것으로 정리하고 점장에게 보고하러 들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점장실에서 나온 권팀장이 성원에게 웃음 듬뿍한 표정으로 점장이 찾는다는 전갈을 했다. 긴장한 성원은 김부사장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까 궁리하며 점장실로 들어갔다. 정상무는 시청 광장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먼저 말을 붙이기 망설이며 멀뚱하게 서 있는 성원으로 손짓으로 불렀다. 다가서서 나란히 창밖을 바라보게 되자, 정 상무가 말했다.


 "저기, 시청 벽면에 전광판 있지.. 저기다 우리 오픈 광고 할 수 있나..."

 "그건 생각을 안 했습니다. 김 부장도 아무 말 없었고. 저희 광고 담당도 매체 계획에 없었고.."

 "아니.. 그건.. 팀장이나 광고 담당 문제가 아니고... 민대로 생각은 어떠냐고.."

 "저도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청 벽면이라 공익광고만 하고... 또 할 수 있다 해도 우리 백화점이

   거기에 틀 만한 영상 콘텐츠도 없고...'

 "아니.. 그런 것 말고. 민대리 생각은 어떠냐고. 저기 광고하면 효과가 있겠냐고."

   한 번만 더 부정하면 격발 하게 될 것이다. 정상무가 결론을 정해 놓고 질문할 때는 일단 거기에 맞춰줘야 한다. 거 다음에 한 호흡 돌리고 진실을 이야기하면 알아듣는 사람이다. 권 차장이 일러준 방향대로 대답했다.

 

 "몰론, 효과적입니다. 어쨌든 송안시에서 유동 인구 가장 많고, 시청 벽면이니까, 왠지 신뢰감도 들고.."

 이제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정상무가 성원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럼.. 방법을 찾아보라고.. 문제가 뭔지는 민대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근데.. 점장님..?" 

  일부러 울상을 지으며 정상무를 바라봤다. 사슴 같은 눈망울로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사냥꾼에 잡힐 듯한.

 "저한테 왜 그러세요. 분명히 김팀장도 있고, 광고 담당자도 있는데... 왜 저만 불러서... 

   김 부장한테 보고하면 오해합니다. 제가 점장님께 이상한 말해서 일을 만들어 온다고.."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지금 창밖을 보다 문득 생각났는데, 마침 너네 팀장은 외근이고, 너밖에 없으니까

   불러서 지시하는 거지. 팀 내에서 회의를 하든, 업무를 재배정하든 그건 너희들 사정이고, 내일까지 보고해"


   또 나왔다. 내일 까지. 내일 아침에. 보나 마나 깁부장은 오늘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마을 잔치가 끝나면 현장 정리하고 직원들과 뒤풀이하고 퇴근. 내일 아침까지 안 나타날 것이다. 유선으로 보고해 봐야 심드렁하게 내일 봅시다 할 것이고, 결국 해결책을 꼼짝없이 미리 준비해 놔야 한다. 


 "내일 초청장 돌리러 간다며.., 

  어쨌든 그 집안이 송안시 상공회의소나 송안 시장 상인회에도 영향력이 크다니,

  그런 면에서도 앞으로 잘 지낼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들어... 김사장은 나도 한번 만날 생각이니까.."


    정상무의 지시를 협박으로 들으며 사무실을 나왔다. 이 순간 생각나는 것은 단 하나. 꿀꿀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 정원으로 올라갔다. 어느덧 가을의 한복판으로 들어선 하늘은 노을을 뿜으며 발악하고 있다.


"제길... 오늘도 야근이야.... 뭐 아무거나 다 갖다 붙이면 붙는 거냐.

  내가 뭐 자석이냐.. 마술사의 연결 고리냐.. "

 

저녁 먹자는 인아의 메시지에 벌컥 화를 냈다. 쫌.. 좀 기다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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