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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May 31. 2018

아름답고 잔인한 도시

제가 사는 곳입니다.


아이들은 깊게 생각하는 것도, 반성하는 것도 미숙합니다. 소수의 건강한 어른들만이 다년간 쌓아온 습관 같은 것이니까요. 삶의 방식은 누군가 정해주는 게 아닙니다. 제대로 산다고 보상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세워놓은 삶의 잣대나 기준은 그저 자신에게만 유효한 그림자 같은 것이니까요. 그마저도, 여러 번 생각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단순한 이성이나 이론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 저만의 규칙이나 상상같은 것으로 앞으로의 제 행보를 꾸며내길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타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지탄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삶에는 정답이나 올바른 지표는 없으니까요. 제가 타인을 경계하는 이유입니다. 타인과 한데 섞이고 주먹구구식으로 타인의 세상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상대에게 여러가지 잣대를 들이대게 됩니다. 나만의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무시하게도 되며, 은연중에 그것을 감추려 상대를 기만하기도 하죠. 그건, 상대에게 피해를 줘서도 그렇지만 그런 제 모습을 추하다고 생각하는 성향때문에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라고 어느순간부터 생각합니다. 생계나 생활로 뛰어들자면 그런 신념이 가루처럼 부서지기도 하지만 반드시 반성의 시간을 거치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저만의 의미부여나 이성이라고 하더라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제가 만족해지기 위한 이유로는 충분하니까요.

우습게도 한 때, 이런 것을 부끄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집단생활이 전부였던 학창시절 때엔 더더욱 그랬습니다. 나만의 생각, 내가 하는 엄숙한 것들이 집단에서는 반드시 제거돼야하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이었습니다. 생각한다는 건 튀는 것이었고, 반성이나 신념은 쪽팔린 것이어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땐 꼭꼭 감추어 티내지 말아야 함을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어느순간 내가 누군지 모르겠더라고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어느 때에 화가 나는지, 내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학창시절이 지났습니다. 어른이 돼도 시간을 쓰는 법을 몰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데로 따라다니기 급급했고, 갑작스레 맞이한 성인의 날들은 견고했던 집단의 틀을 한순간에 벗어나야하는 막연한 시간들이 돼버렸습니다. 그게 또 세련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세련, 이라하는 것의 기준은 타인이었습니다. 다수의 타인이 선택한 그곳에 세련미와 우아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설프게 그곳에 갔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학창시절을 벗어나도, 스스로 꾸준히 집단에 어울리는 연습을 해야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학생때보다, 혼자서 그것을 연마해야한다는 것이 더 큰 불안함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다수라고 해서 틀렸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다수가 따르는 것, 다수가 선택한 것엔 그만한 장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다수도 따로 두고 보면 개개인인데, 여러 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어딘가 모자라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부족한 건 성실함과 용기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게으름과 연약함이 틀을 만들어냈습니다. 단점만 있지도, 장점만 있지도 않은 안정적인 틀은, 결과적으로 가장 무난하고 평범한 행복을 만들어내는 밋밋한 것이 돼버렸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행복해합니다. 소박한 행복, 소소한 기쁨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게 삶이고, 그마저도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수없습니다.

이 모든 건 아름답고 잔인한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틀 속에서 잔인한 것들을 종종 해냅니다.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집단으로 누군가를 따돌리고, 꽃이 날리는 거리에서 집단이 만들어 놓은 기준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제가 우려하는 부분입니다.

전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학원이지만, 아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자신의 살을 떼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의 부모는 자해, 라는 한 단어로 단순하게 말합니다. 양쪽 팔이 핏자국으로 가득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의 팔을 보고 수근댑니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생각의 깊이가 얕고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에도 자신들이 가진 마음의 형태가 너무나 막연하니까요. 역시 옳고 그른 건 없습니다. 집단이라고 무조건 틀렸고 소수라고 무조건 올바른 게 결코 아닙니다. 그저 집단으로 뭉쳐있는 아이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그 아이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름답고 잔인한 이 도시엔 위계와 추억이 공존한다고요. 그래서 난, 이곳에서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하는 점은, 반드시 틀에 갇혀 생각하지 않아야 겠다고요. 형태 없는 생각입니다. 끄적이는 건, 조금 더 오래 머물 힘을 더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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