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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Jan 29. 2019

고요할 정, 사랑 애 ㉯

<연재 소설>


*스물, 이름을 묻는다면 : 정 애 



이름을 묻는다면, 정애는 고요할 정, 사랑 애라고 했다. 남자와 여자는 차분히 사랑하라는 소망을 품고 정애에게 정애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정애는 몇 번 연애라는 걸 했다. 이름처럼 차분했던 연애는 한 번도 없었지만 끝이 나면 모든 게 그럭저럭 괜찮았던 연애로 기억되곤 했다. 빈번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상처를 입는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자신도 적절하게 상처를 줬던 입장이라 미안함과 수치심이 공존하는 연애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랑이었나, 생각하면 알 수 없었다. 주고받은 상처가 무엇인지 따지는 걸로 봐서 사랑은 아니었겠다, 결론지었다. 고요한 사랑은커녕, 고요한 연애도 불가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

정애는 병실에 누운 여자 몸을 닦았다. 살이 종이처럼 말라 뼈에 붙어가는 신세라도 살아있는 것이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 사람의 온기가 있다는 것 하나로 삶의 많은 적막함 중 일부는 외면할 수 있었다.


“엄마, 그 사람은 어떤 사연이 있을까.”


구영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자의 팔을 들어 겨드랑이를 닦으며 정애가 물었다. 눈은 떴지만 멈춰버린 동공으로 한 곳만 응시하는 여자는 아무 답이 없다. 미이라처럼, 석고상처럼 굳었다. 정애는 여자 얼굴에 수건을 갖다 대었다. 움직이며 보낸 세월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주름 하나에 사연 하나씩 있을 법도 했지만 여자의 사연이라고는 고작 병실에 누워 보낸 구 년, 그게 다였다.   

  

정애는 지나간 사연 하나를 떠올렸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여자가 모아둔 돈으로 생활을 이어나가기엔 무엇에든 빠듯했다. 대학에서 만난 선배가 일하던 바에 나가게 됐다. 주된 일은 손님들이 오면 말 상대가 되어주거나 술을 따라주는 것이었다. 업무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일이었지만, 생계라고 생각한다면 완전히 다른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곤색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남자는 더러는 일행과 오기도 했지만 혼자서 바를 찾는 일이 많았다. 핸드폰 배경화면엔 어린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붙박아두고 매번 같은 술을 마셨다. 남자는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정애는 그런 느낌에는 셈이 빨라, 조용히 술만 건네었다. 남자는 몇 번 술을 넘기더니 한 곳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자리를 뜨곤 했다.

한 번, 멍하니 무언가를 응시하던 남자는 별안간 테이블에 고개를 묻었다. 심하게 취한 것인지 싶어 정애는 남자를 돌아봤다. 남자는 울고 있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정애는 조용히 티슈 상자를 남자 옆으로 밀어뒀다. 기척에 고개를 든 남자는 정애를 한동안 바라봤다. 남자는 정애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연락해도 되나요.” 남자는 이어서 물었다. “네.” 정애는 답했다.     


그 후 몇 번, 정애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연인관계라기 보단, 잠 들기 전 통화를 몇 번 하거나 남자가 바에 왔을 때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다. 바에서 술을 기울이던 남자는 정애에게 눈짓했다. 남자와 정애는 흔히 사는 이야기를 했다. 남자는 기러기아빠였다. 부인과 딸은 외국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나가 있다고 했다. 정애는 남자에게 그날, 왜 그렇게 울었던 건지 묻진 않았다.     


“그날, 울었던 건, 딸애가, 17살 생일이었는데, 자기는 아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더라고요. 돈만 보내는 건 후원자일 뿐이라고요. 아내도 전화 한 통 없고. 떨어져 있지만 저그들 공부하고 좋은 거 먹으라고 돈도 보낸 건데 돌아오는 답이 그거였어요. 물론, 외국에 나가기로 결정한 건 아이의 바람은 아니었지만요. ” 


남자는 설명하듯 말했다.


“그랬나요.”

“어렸을 땐, 그렇지 않았어요. 재롱도 자주 부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그럴 때마다 턱수염으로 볼을 긁어주면, 까끌거린다고 우스워하던 아이였어요.” 


남자는 핸드폰을 켜 딸 아이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정애씨는 성공한 삶이 뭐라고 생각해요?” 


남자는 핸드폰을 덮었다.


“글쎄요.”

“난 지루함을 잘 견뎌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루함이요?”

“이제부턴, 지루할 줄 알고 사는 거예요. 어릴 땐, 나한테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어요. 밤에 보이는 별만 봐도 그렇잖아요. 세상엔 엄청난 것들이 많이 있을 거 같았어요. 어른이 되면, 일도, 사랑도, 꿈도, 지금보단 더 행복하게 이룰 수 있을 거라고요. 근데 지금 와서 보면, 무료하게 번 돈으로 이렇게 술이나 마시는 신세인걸요. 술 한 번에 무언가라도 풀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따분한 어른이 된 거죠. 결국,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확인시킬 뿐인데요.”

“가족이 전부라곤 생각하지 마세요.”

“어떻게 해야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요.” 남자는 물었다.

“역할에 의지하지 않는 어른이 되는 게 먼저 아닐까요.” 


정애는 무료하게 컵을 닦으며 말했다.


“정애씨는 좋은 아빠가 있었을 거 같네요.” 남자는 말했다.     


남자는 정애와 함께 있길 원했다. 정애와 남자는 동이 틀 때까지 함께 있었다. 침대에 누우니 누렇게 들러붙은 벽지에서 곰팡내가 나는듯했다. 눅눅한 공기가 몸 구석구석에 내려앉았다. 옷을 벗고 서로를 만져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따분한 섹스였다. 남자는 옆으로 쓰러져 누운 채 딸애인지 부인인지 모를 이름을 웅얼거렸다.

술에 취해 누운 남자를 살핀 뒤 정애는 남자의 지갑을 펼쳤다. 남자의 지갑엔 날짜가 지난 콘돔 두 개와 여자들이 있는 술집 명함이 끼워져있었다. 문자 수신으로 핸드폰이 울렸다. 남자의 것이었다. [오빠~ 요즘 왜 이렇게 뜸해. 단골님께서.]

정애는 남자의 지갑에서 현금 얼마를 꺼냈다. 낡은 캔버스 운동화를 구겨 신으며 모텔방을 나왔다. 해가 완벽히 비추기 전, 회색빛 도시가 보였다. 그 날 이후, 정애는 더이상 바에 나가지 않았다.      


남자와 나눴던 대화는 완벽히 기억해낼 수 없지만 정애에겐 그런 사연도 있었다. 정애는 생각했다. 다 자기들 좋을 대로 사는 거야.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원하는 걸 어떤 식으로든 채워나가면서. 그게 추하든 아니든 피해를 주고받는 건 엿같아도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런 걸 상처, 라고 하는 거겠지. 내가 상처 입지 않기 위해선, 주는 것밖에 없어 엄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진심을 의심하는 거야. 진심이어도 의심하는 거야. 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구영씨가 어떤 사연이 있든, 엮이지 않으면 되는 거야. 서로의 외로움이나 무료함 따위 핥아주는 거 구역질나. 생각하며 정애는 여자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음 한쪽 뭉근히 구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아홉, 이름을 묻는다면 : 너, 정애.  


    

“너, 정애. 정애야?”


염희였다. 정애는 병실에 누운 엄마 옆에 엎드려있었다. 열아홉, 정애는 학교가 끝나면 엄마가 있는 곳으로 늘 향했다. 염희는 정애와 같은 반 친구였다. 학급에서 반장을 맡고 있었고 다소곳하고 성격도 밝은 데다 공부까지 잘해 아이들과 선생님이 염희를 두고두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그랬던 염희가 정애에게 말을 붙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너, 정애, 라는 말에 정애는 그야말로 정애가 되어버린 듯했다. 태어난 이후부터 줄곧 정애라고 불렸을 테지만, 염희가 불러버린 너, 정애, 라는 말에 전적으로 자신이 정애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진짜 정애가 되어버린 정애는, 원래의 정애라면 이럴 때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가늠했다. 원래의 정애는,


“아니.” 답했다.


염희는 미간을 구겼다.


“정애가 아니라고?”


염희는 물으며 정애가 입고 있던 교복 왼쪽 가슴에 붙은 이름표를 가리켰다. 아무리 당황했더라도 너무 바보 같은 대답이었다. 누가 봐도 정애 자신인 것을, 스스로 아니라고 답하다니. 정애는 별안간 모든 게 부끄러워졌다. 눈을 뜨고 입을 벌린 채 누워있는 엄마도, 그 옆에서 정애가 아니라는 멍청한 답을 한 자신도. 염희는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염희는 팔 인실 병실에 있던 또 다른 침대 곁으로 가서 섰다. 그곳엔 허리에 호스를 끼운 노인이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염희는 노인의 머리를 쓸었다.


“우리 할머니야.”


염희는 말했다. 정애는 노인을 보았다. 빼빼 마른 몸은 자신의 엄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염희는 할머니 옆에 있는 간이침대에 앉았다. 정애 엄마가 있던 침대로부터 한 칸 띄어진 곳이었다.


“너희 어머니니?”


염희가 물었다. “응.” 정애는 답했다. “너희 어머니도 꽤 오래 계신 것 같네. 우리 할매는 얼마전에 팔 인실로 옮겼어.” 염희는 말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시선은 할머니에게 고정한 채였다.

정애는 염희에게 아픈 할머니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다른 것을 알았나 하면, 꼭 그렇지도 않았지만 자신과 닮은 사연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생각도 못했다. 정애에게 있어서 염희는, 구김살 없이 명랑하게 지내는 아이였다. 정애는 이런 사연엔 어느 정도 편견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앞둔 사람을 보는 것, 며칠간 찾아오는 가족은 없었고, 처음으로 이곳에서 염희를 보게 된 것. 저 할머니에게 이렇다 할 가족이라곤 염희뿐인 것인가, 하는 것. 그런 것들을 곱씹으니 어쩐지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던 염희가 친근해지기까지 했다. 편견에서 나온 일종의 안도,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 어디가 아프시니?” 정애는 물었다.

“늙었으니까, 그냥 여기저기.”

“우리 엄만, 식물인간이야. 일 년째.” 염희는 정애의 엄마를 한 번 바라봤다. 정애의 엄마는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염희가 자신을 보는 것도 괘념치 않는 것 같았다.

“엄마, 우리 반 반장이야.” 정애는 엄마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랑 말도 하니?” 염희는 물었다.

“그냥, 혼잣말하는 거지 뭐.”

“난 죽었음 싶은데.”

“누가?”

“할매랑 나.” 염희는 말했다.


정애는 염희를 바라봤다. 자신은 한 번도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물론 그 반대도 그랬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을 여럿 보고도 죽음이란 건, 생각한 적 없었다. 그랬던 것을 염희는 너무 쉽게 말했다. 염희는 말했다.


“딱 한 달이야. 한 달 안엔, 죽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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