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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Jan 31. 2019

고요할 정, 사랑 애 ㉰

<연재 소설>


*스물일곱 정애 : 구영 씨는, 사랑을 아나요?     



구영과 정애는 알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전보다 편해졌지만 연인이 된 것도, 친구가 된 것도 아니었다. 둘 사이의 관계를 규정지으려는 무엇도 둘에겐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사이, 알 수 없지만 편안해진 사이라는 느낌만 조금 생겨났을 뿐이었다. 연락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퇴근 후 성곽에 올라 라떼 한 잔씩 나누고 오는 게 다였다. 정애와 구영은 같은 열차 안에 있지만 제각각 다른 곳에서 내리게 될 사람들처럼, 알고는 있지만 알 수 없는 사이가 돼버렸다.

한파가 잦아들 즈음, 카페 특성상 한 지점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어서 구영이 다른 지점으로 옮기는 것이 결정되었다. 정애는 그렇다면, 자신과 구영은 또 어떤 사이가 되는 건가, 다시금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뚜렷한 무언가가 없어도 항상 만나게 되는 곳이 있었다. 어색함도 풀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또다시 새로운 것을 생각해야만 했다.

      

“오늘, 라떼 한잔할까요?”  

   

처음으로, 정애가 건넨 질문이었다. 매번 구영이 라떼를 먼저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들고 성곽에 올랐다. 정애가 말을 건넨 뒤 구영은 어떤 어려움인지 기쁨인지 모를 것에 일순간 멈춰버렸다. 구영은 처음이란 것이 이리도 생경한 것인가, 생각했다.

     

정애는 목도리에 얼굴을 묻고 성곽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어깨 부근에 얼굴을 숨긴 채 몸을 움츠렸다. 다들 바삐 어딘가로 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나 좁은 땅덩어리에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각자가 향할 곳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 정애로서는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은 구영을 따르면 됐다.


성곽 돌담은 여전히 네온사인 빛으로 까마득히 빛났다. 고요했다.

     

“구영 씨, 일주일 후면 가나요?”

“그렇게 되겠죠?”

“잘 가요.”

“연락할게요.”    

 

정애는 성곽 위에 라떼를 올려두고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담았다. 괜스레 신발 앞코로 애꿎은 바닥을 톡, 톡 파냈다.   

  

“구영 씨, 난 구영 씨랑 가까워지는 게 무서워요.”

“왜요?”

“가까워지면, 믿게 돼요.”

“믿는 게 나쁜 건가요.”

“믿으면, 상처를 주니까요.”

“차라리, 상대가 나한테 상처를 주는 게 나은 거 같아요. 내가 주는 것보단.”

“그것도 상대한테 실례예요.”

“뭐든 둘이 되면, 실례를 하게 돼요. 어쩔 수 없어요.”

“구영 씨는 더 행복해질 수 있어요. 내가 아니어도요. 내가 아니라고 해도 구영 씨가 도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딘가엔 있을 거예요.”   

  

구영은 자신의 라떼도 성곽 위에 두고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담았다. 정애 쪽을 향해 몸을 살짝 비틀었다.   

  

“정애 씨, 난 항상 끝을 생각해요. 삶의 끝이요. 내가 죽을 때가 되면 그때 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고요. 마지막으로 남을 생각 하나, 그거 하나는 뭘까. 죽을 때가 되면, 마음껏 사랑해보지 못한 것들이 보고 싶지 않을까. 이렇게 말해버렸으니까 죽을 때가 되면, 아마 정애 씨도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 내 곁에 정애 씨가 없다면, 혼자이거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면 미안하지만, 마음껏 사랑해보지 못했던 정애 씨를 떠올리지 않을까. 그게 아마도, 후회가 아닐까. 앞으로 남은 생은 후회를 줄이려고 살 거예요.”

“지금 이거, 고백인가요.”

“글쎄요.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 중에 제일 멋졌어요.”   

  

정애는 웃었다. 구영도 정애를 보고 웃었다. 성곽 아래에서 올라온 불빛이 두 사람 몸 어딘가에 파편처럼 머물렀다. 바람이 세게 한 번 불자 은근히 머물던 빛은 다시 사라졌다.

성곽 끝부분에 전에 없던 것이 있었다. 동그란 눈 뭉치 두 개가 합쳐진 눈사람이었다. 나뭇가지로 앙증맞게 눈코입도 새겨있었다. 정애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냈다. 늘 챙겨 다니는 것이었지만 잘 사용하진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눈사람 목으로 짐작되는 부분에 둘렀다.   

   

“구영 씨, 눈사람은 눈사람이라 추운 곳에서도 잘 있을 것 같죠?”

“그렇죠.”

“근데 오히려, 눈사람은 몸이 눈이라 더 추울 것 같아요.”

“그런가요.”

“어쩔 수 없이 눈사람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그게 잘 적응이 될까요. 우리가 만들어서 눈사람이 된 거지, 한 번도 눈사람한테 너 눈사람 할래? 허락 같은 거 받아본 적 없잖아요. 만든 사람의 욕심이죠.”

“귀여운 생각이네요. 나도, 내일은 목도리나 두를까 봐요.”

“구영 씨, 지금 같이 둘러요.”

“그럼 좀 덜 춥나.”

“눈사람보단요.”   

  

구영은 정애 옆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 섰다. 정애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반 바퀴 풀어 구영의 목에 둘렀다. 구영은 정애와 얼굴이 더 가까워지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묻었다. 이상하게 자그마한 것들에 아직도 가슴이 뛰는 건, 어른이 된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런 느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은 꽤 근사하다고, 구영은 생각했다.   

  

“정애 씨, 목도리 이거, 고백인가요.”

“그럴 리가요.”     


*열아홉, 나비 : 빛날 염 고울 희     



염희는 담배를 피웠다. 스무 살을 앞둔 나이이긴 했지만 염희 같은 아이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정애로선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정애는 법칙이나 규율 같은 것에 최대한 적응하며 살아왔다. 벗어나는 법을 몰랐고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평범하고 무난하게, 튀지 않고 모나지 않게 지냈다. 다른 아이들은 그런 정애가 눈치를 많이 본다고 종종 얘기했지만, 그런 눈치가 정애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다. 그런 정애에게 염희는, 위험한 아이였다.     


“한 대 피울래?”

염희는 물었다. 정애와 염희가 하교 후 병원에 같이 가는 길이었다. 정애는 고개를 저었다.


“난 할머니랑 살아. 지금은 할머니도 병원에 있어서, 혼자 살아.”

“그러니.” 정애는 답했다.

“넌 왜 그렇게 눈치를 봐?” 염희가 물었다.

“눈치를 보는 게 나쁘니?”

“아니. 그냥 다른 애들이 그러기에.”

“눈치를 보면,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아.”

“무서운 거니. 특별한 일이.”

“귀찮아. 그냥.”

정애는 발끝에 걸린 사이다 캔을 톡- 차며 말했다.


“당당히 눈치 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 같은 거 듣지 말고.”


 염희는 뭉툭하게 깎인 담배꽁초를 벽에 눌러 불씨를 껐다. 얼마간 꽁초를 들고 걷다가 쓰레기통이 나오자 다소곳이 버렸다.


“이런 말은 처음이네.” 정애가 말했다.

“남들이 하는 말 같은 거, 다 지들이 불편해서 그러는 거야. 네가 왜 그래야 하는지는 생각한 적도 없으면서.”

“너, 담배 피워도 돼?”

“담배라도 안 피우면, 따분해서 어떻게 살아?” 염희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다른 재밌는 걸 하면 되잖아.”

“재밌는 거 뭐? 섹스?” 염희는 이번에는 정애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정애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좀 더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많잖아. 가령, 네가 잘하는 공부라든가 책을 읽는다든가. 하다못해 애들하고 햄버거를 사 먹으러 갈 수도 있고.”

“넌 그런 게 재밌니. 그럼 넌 왜 그런 것들을 안 하는데?”      

염희는 다시금 정애와 거리를 두며 핀잔했다.     

“난, 소란스럽지 않은 게 좋아.” 정애는 말했다.

“정애. 넌 이름처럼 좀 조용한 것 같아.”

“고요할 정, 사랑 애. 촌스러워. 네 이름은 무슨 뜻이야?”

“고울 염, 빛날 희.” 염희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애와 염희는 가방끈을 구겨 잡고 함께 걸었다. 언덕 위에 놓인 병원 간판이 구부러져 보였다. 병원 근처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제각각 갈 길로 사라졌다. 정애와 염희는 사람들 틈 사이를 지나쳤다. 염희는 정애와 거리를 조금씩 좁혀 걸었다.

‘염희는 위험한 아이다.’ 정애는 생각했다.     


염희 할머니가 누운 자리 찬장 위에는 오묘한 것이 하나 놓여있었다. 검은색 천을 뒤집어씌운 네모난 통이라고 짐작되었다. 염희는 정애와 함께 병원에 들러 할머니를 살핀 후, 밤이 되면 네모난 통과 화장품 파우치, 옷이 든 종이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화장을 진하게 한 뒤 네모난 통을 겨드랑이에 낀 채 어딘가로 사라졌다.

염희는 정말 위험한 아이인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즈음 정애는 딱 한 가지라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매일 밤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지를 물어야 하나, 그 네모난 통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하나. 정애는 골몰했다. 딱 한 가지만 골라서 묻고 싶은데, 질문이 쏟아지면 염희 입장에서 자신과 꽤 가까워졌다고 믿어버리진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이런 생각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못나 보여 그만두게 되었다.


난 왜 이리도 찌질한가, 라고 이따금씩 생각하던 새에 염희는 정애를 불렀다. 정애는 태연하게 무슨 일이냐 되물었다. 염희는 정애에게 화장실에 같이 가줄 것을 부탁했다. 처음으로, 정애를 대동한 날이었다. 화장실 좁은 칸에 염희와 정애는 함께 들어갔다. 몇 발 치만 옮겨도 변기가 종아리에 닿는 구조였다. 염희는 변기 위로 성큼 올라가 교복을 벗었다. 정애는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꼭 하고 싶었던 질문 중 어떤 한 가지를 골라야 할지 빠르게 셈했다.      


“이 통은 뭐야?”     


정애가 고른 질문은, 검은 천으로 덮인 네모난 통에 관한 것이었다. 정애는 변기 위에 올려진 통 귀퉁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비.” 염희는 갈아입은 윗도리를 내리며 말했다. 머리카락이 부산스레 뺨에 붙었다.

“나비?” 정애는 되물었다.   

  

염희는 변기 위에서 사뿐히 내려왔다. 몇 초간 정애를 바라보더니 통 위에 올려져 있던 검은 천을 걷어냈다.

정말로 그곳엔, 나비가 있었다.

손가락 세 마디만 한 나비 한 마리가 파란 비늘을 자랑하며 조용히 미끄러져 내렸다.    

 

“한 달 안에 내가 죽으면, 얘를 데려가 줄래?” 염희는 정애 앞에 통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름이 뭐야?” 정애는 물었다.

“없어.”

“그럼 뭐라고 불러?”

“그냥, 뭐. 얘?”

      

염희는 웃었다.

정애도 따라 웃었다.


묘하고 고운 빛이었다. 몸 어딘가에서 뿜어나오는 것인지, 빛을 받아 반사된 환영일 뿐인지 기묘했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나비 라는 것에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지만 염희가 들고 다니는 나비로서는 나비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통을 사이에 두고 염희와 정애는 눈을 맞댄 채 한동안 나비의 몸짓을 살폈다. 곧이어 화장실 센서등이 꺼졌다. 염희는 통을 살짝 움직였다. 센서등이 심드렁하게 다시 켜졌다. 정애와 염희는 투명한 통 안에서 미끄러지듯 퍼덕이는 나비를 보았다. 나비의 날갯짓이 보였다.


어쩐지 죽음을 예고한 염희의 사연을, 나비는 알 것만 같다고, 정애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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