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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Feb 05. 2019

고요할 정, 사랑 애 ㉱

<연재 소설>

*스물일곱 정애 : 가장 무서운 것.     



정애는 테이블을 닦았다.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잔여물들을 쓸어 담았다. 삐쳐나온 빨대와 슈가스틱을 정리하고 동그란 커피 자국이 남은 머그를 양 손 가득 들고 날랐다. 한 테이블에 여섯 이상이 둘러 앉은 자리에 가서는 죄송하지만 자리를 나눠 사용할 수 있으신가요, 조심스런 말도 건넸다. 무엇이 죄송한 건지 터득하는 과정은 생략되었지만, 손님들에겐 늘 죄송한 입장이었다. 사람들은 언짢아 했다. 어떤식으로든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으레 보이는 인상이었다. 정애는 애써 신경쓰지 않았다. 미소를 잃지 않았고 모자를 정돈해서 썼으며 계산은 빠르지만 정확했다. 자신이 해야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나누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마감 하면,자주 숨을 몰아 쉬었다.

직원들이 하나둘 씩 퇴근했고 여전히 마무리는 정애 몫이였다. 숨을 고르며 간이 의자에 주저 앉았다. 유리창 너머 어두워진 거리를 바라봤다. 창가 모서리부터 조금씩 성에가 끼었다. 뿌옇게 된 귀퉁이를 보며 생각했다. 구영 씨가 갔구나. 다른 지점으로 가버렸구나. 오늘부터 마감은 아마도 나 혼자 하겠구나.

정애는 어쩐지 괜찮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구영은 사라졌지만 마음에 큰 울림같은 것은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애는 한숨을 뱉어내고 일어났다. 라떼 한잔을 만들어 여자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남자는 아직도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전보다 연락은 잦아졌다. 여자의 안부를 묻기도 했고, 가끔씩 돈을 보내오기도 했다. 어렴풋하게나마 다시 가족의 모습을 되찾고 있는 건가, 정애는 생각했다. 동시에, 아무렴 어떠냐는 식의 마음이 솟기도 했다.

     

여자는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간병인을 고용했지만 낮동안만 일을 해주기로 해서 솜씨와는 무관하게 여자는 온종일 같은 자세로 누워 몸을 견뎠다. 여자를 옆으로 뉘어 손으로 짐작하니 등에는 땀띠가 촘촘히 맺혀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욕창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정애는 물수건을 가져와 여자의 몸을 닦아내 주었다. 한참을 닦아내고 한숨 돌릴 즈음, 찬장 위에 두었던 라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구영이 생각났다.


“엄마, 나, 그 아이를 잊어도 될까.”


정애는 손에 든 라떼 잔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굳어버린 나무 조각처럼 수분 없이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불 꺼진 병실, 정애는 간이침대에 누웠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켰다. 정애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한참을 망설였다. 곧이어 구영의 이름을 누르고 내용을 적었다

.     

‘구영 씨, 끝말잇기 할까요?’    

 

정애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았다. 핸드폰을 가슴 위에 두고 손을 포개 쥔 채 괜한 것을 보냈다는 생각을 부러 했다. 답이 늦어질수록, 그런 생각은 더 커져만 갔다. 십 분쯤 흘렀을 때, 답이 왔다.     


‘요구르트’

‘트렁크’ 정애는 답문했다. 머리맡에 두었던 라떼를 한 모금 또 들이켰다.

‘크레용’

‘용서’

‘서로 생각하기.’      


구영의 답문이었다. 정애는 멈칫했다. 정애는 이런 순간들이 무서웠다. 이런 순간을 만들고 싶어서 연락을 한 건 아니었는데, 이런 것을 기대하고 있던 게 맞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정애는, 분명 이 정도면 괜찮을 줄 알았다.     


‘구영 씨, 내가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정애는 답했다. 오 분이 흘렀다. 전화가 왔다. 정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애 씨, 제일 무서운 게 뭐예요?” 구영은 대뜸 물었다.

모두, 침묵했다.

“잊는 거요.” 간이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정애는 조용히 말했다.

“누구를요?”

“잘못했던 것들을요.”

“잘못한 게 많았나요?”

“사랑했던 것들, 잘못했던 것들, 슬펐던 것들, 전부 잊어가는 게 너무 무서워요.”

“우린 왜 잊을까요.” 구영은 물었다.

“모두 살려고 그런 거라고 핑계를 대지만 사실, 귀찮은 거 아닐까요. 재미없는 거예요. 오래 슬퍼하는 것도, 오래 그리워하는 것도. 그리워하고 슬퍼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까 질려가는 거죠.”

정애는 답했다.

“그게 나쁜 건가요? 정애 씨 말대로 우리가 그런 존재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걸 수도 있잖아요.”

“아니요, 우리가 잊는 것들은 대부분 약한 것들이에요. 나보다 약하거나 나보다 못난 것들. 기준을 재는 건 아니겠지만 무의식적으로 우린 그런 것들만 지워가요.”

“약한 것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싶나요?”

“사랑은, 모르겠어요. 그냥 나한텐 강한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 약한 것들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구영 씨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될까 봐, 두려워요.” 정애는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멋진 말이 떠오르지 않아요. 끝말잇기나 할래요.”


*열여덟 정애, 가장 무서운 것은 : 잊게 되는 것.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바다와 나비>

     

“나비가 생기고 나서 이 시를 보니까, 느낌이 달랐어.” 핸드폰에 뜬 시를 보여주며 염희가 말했다.

“네 나비는 파란 나비잖아.” 정애가 대꾸했다.     


염희는 싱거운 말을 했다는 냥, 정애를 향해 눈을 흘겼다. 염희는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곤 한 손엔 검은 천을 덮은 나비 채집 통을 들고 한 손으론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곤 정애를 보며 바지춤을 앞으로 움직였다. 두 손 모두 할 일을 하고 있으니 정애에게 라이터를 꺼내달라는 눈치였다. 정애는 염희의 바지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냈다. 곧이어 염희는 담배를 문 입을 흔들었다. 불도 붙여달란 표시였다.     


“너 가끔, 짜증날 때 있어.” 정애가 말했다.

“진지하게 말하면, 너무 진심같잖아.”

진심이었다.     

“너, 밤마다 어딜 그렇게 가?” 정애가 물었다.

“궁금해?”

“딱히. 그냥 묻는 거야.”

“너도 같이 갈래?” 정애는 처음으로, 염희 눈빛이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얼떨 결에 정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염희는 정애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두 번째 동행이었다. 전과 같이 변기 위에 나비 통을 올려두고, 옷을 갈아입고, 공들여 화장을 했다. 정애는 영문을 몰랐지만 변기 위에 덩그러니 앉아 나비통을 끌어 안았다. 염희는 순식간에 일을 마치더니 정애에게 눈짓했다. 둘은, 병원 밖으로 나갔다.


밤이 되면 번화가엔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시간을 탐내 밤을 훔쳐보겠단 표시였다. 사람들이 많았다. 꾸준했다. 도심으로 나오면 인파는 끊이질 않았다. 염희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한 곳만을 응시했다. 발걸음은 빨랐지만 어딘가로 가는지 방향은 알 수 없었다. 깊고 거칠은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정애는 문득 생각했다. 염희는 대체 언제 공부를 하길래 그렇게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는지. 염희는, 참 위험한 아이다. 동시에 알 수 없는 아이다.

싱거운 생각을 물리치며 정애가 도착한 곳은 어느 골목 어귀였다. 여전히 사람은 드문드문 지나다녔지만 조금 전보단 훨씬 한가한 곳이었다. 염희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빨간색 줄무늬 티. 청 반바지요.’ 염희가 문자에 입력한 내용이었다.     


“남자를 만날 거야. 넌 저기 숨어있다가 그 사람이 오면 나를 뒤쫓아.” 염희는 핸드폰을 닫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너 이런 일 해?” 정애가 물었다.

“일이야 뭐든. 모텔 주변에 편의점이든 카페든 들어가있어. 내가 두 시간이 넘도록 나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를 해줘.” 염희는 정애가 들고 있던 나비통을 채갔다.


정애는 여기까지 따라온 이상 걱정이 된 건지, 무언가 궁금해진 건지 염희의 말대로 건물 뒤편에 몸을 숨겼다. 곧이어 한 중년 남성이 어물쩍 걸어왔다. 괜히 좌우를 살피며 어떤 볼 일도 없는 사람처럼 염희 앞에 섰다. 둘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이내 발길을 옮겼다. 정애는 가슴 위에 손을 두고 움켜쥐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네온사인을 피한 곳이었다. 골목 어귀, 편의점 불빛 하나에 의지해, 글자가 떨어진 모텔 간판이 간신히 제 역할을 해냈다. 새파란 달빛이 내려왔음에도 제법 어두운 곳이었다.

달빛에 새겨진 줄무늬 같은 것이 묘하게 보였다. 꼭, 지도 같았다. 지구와는 다른 모양의 지도를 품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을 비추다보니 달에게도 말 못할 사연 여러개가 생긴 것만 같았다. 저 무수한 사연들을 파고 들면 지도위에서 걷는 우린 모두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겠지. 만나면, 어떻게 되는 건가. 만나면 만나게 되는 거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고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너도 그렇구나, 나도 그런데. 하면서 무용히 있는 거지. 그게 지도를 만든 것들의 표정이니까. 그게 우리가 가진 무능력이니까. 정애는 생각했다. 달은, 아무 말이 없었다.

파란 나비는 깊고 거칠은 곳으로 들어갔다. 나비가 가진 사연은, 정애가 짐작할 수 없던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이유를 생각할 수 없었고 아무래도 판단할 수 없었다. 편견에서 나온 안도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다.


염희가 남자와 들어가고 두시간이 지나기 전이었다. 정애는 편의점에 앉아 하염없이 염희가 들어간 모텔 입구만을 바라봤다. 입구에서 염희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들어갈 때와 같은 채비였지만 급하게 씻은 모습이었다. 염희는 편의점에 앉아있는 정애를 향해 눈짓했다. 옆구리에는 나비 통을 낀 채였다.

정애는 서둘러 나가 염희 앞에 섰다. 염희는 지친 모습이었다. 주머니에서 현금 몇 다발을 꺼내 반으로 나눴다. 나머지 반과 나비 통을 정애에게 건넸다.      


“오늘도 무사히, 마감했어.”

“이걸 왜 날 줘.”

“한 번이라도 보면, 잊지 않을 테니까. 이제 싫으면 안 와도 돼.”

“그게 아니라. 너 왜 그래.”

“죽기 전까진, 살아야 할 거 아냐.” 염희는 애써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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