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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Feb 14. 2019

고요할 정, 사랑 애 ㉴

<연재 소설>

스물일곱 구영 : 주말인데 뭐 할까요?    

 



“정애씨, 주말인데 뭐 할까요?”

“정애씨, 주말인데, 미세먼지가 많이 빠졌어요.”

“정애씨, 뮤지컬을 보러 갑시다.”


구영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정애에게 전화를 걸기 전이었다. 이런 말을 연습하는 자신이 부끄러운 입장인 건가, 생각했다. 언제나 떨렸다. 정애와 만나는 것도, 정애에게 무언가를 제안하는 것도. 어떤 구실이라고 할까, 조금 더 대범하고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 구실이 구영에겐 어려웠다. 구영은 부끄러움과 자신감은 완전히 반대 방향이라는 건 알았지만, 자신을 모르는 타인에게 부리는 호기, 그것이 정말 자신감인 건지 싶었다. 통화를 하자. 무엇이 되었든 전화를 걸자. 구영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럴까요?”     


정애가 답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후 구영과 정애는 통화를 마쳤다. 정애와의 대화는 화려하지도,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았다. 전반적인 편안함과 사이사이의 들뜬 긴장감, 약간의 부끄러움이 샘솟는 대화였다. 끝이나면 두고두고 생각해볼 수 있는 목소리였고 잠자리에 누워 어둠을 감각할 때 문득 떠오르는 말투였다. 구영은 그런 것이 좋았다. 정애에게 다가가는 자신이, 부끄러움 말고도 더 많은 것을 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했다.

구영은 잘 신지 않던 구두를 꺼냈다. 이물질이 묻지 않았나 살핀 후 천천히 발을 들이 밀었다. 딱딱하게 어딘가 결리는 느낌이 들었다. 발을 반복해서 들었다 놓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보통 운동화만 신고 다니던 그에게 각이 잡힌 구두는 어딘지 좀 어색했다. 그래도 오늘은 주말이고, 뮤지컬이고, 정애씨고, 생각하면 불편함이란 것도 겪어볼만 했다. 구영은 집을 나섰다.     


정애는 하늘빛이 연하게 도는 보송보송한 코트를 입은 채 카페에 들어왔다. 구영과 만나기로 한 장소였지만 자신이 평일 근무로 일하는 곳이기도 했다. 정애를 알아 본 직원들이 하나 둘씩 정애에게 눈짓하며 인사했다. 어디를 가냐는 둥, 오늘 왜 이렇게 예쁘냐는 둥,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던지며 그들은 평소보다 조금 더 새로워진 정애를 관찰했다. 많은 변화를 준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더, 약간만 더, 화장을 했고 옷을 갖춰입었으며 인지하지 못했지만, 표정이 좋았다.

구영이 도착했다. 정애는 카페 창밖에 비친 구영을 보았다. 준비해 놓은 라테 두 잔을 들고 카페를 나섰다. 정애는 구영에게 라테 한 잔을 건넸다.     


“내가 와서 준비하려고 했는데요.” 구영이 아쉬운 투로 말했다.

“누가 하면 어때요.” 정애가 웃으며 답했다.   

  

구영은 정애에게 예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정애는 구영에게 구두를 신었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둘은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말들로 대화를 버무렸다. 천천히 걸었고 기분 좋게 웃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평범이라고 하면 무엇인진 몰라도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웃고 걷고 마시고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십 분쯤 걸으니 뮤지컬 공연을 하는 곳에 가까워졌다.

구영이 예매한 공연이었다. 공연장 입구에 다다랐다. 구영은 공연장 입구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정애가 그곳을 통과했다. 자리를 찾았다. 생각보다 넓은 공연장에 자리를 찾는 데에도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구영은 조금 당황한 투로 “공간이 참 넓네요.” 라고 말했다. 정애가 듣지 못했는지 “네?” 반문했다. 또 다시 답하기 꺼려졌기에 구영은 조금 웃었다. 아무래도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공연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흐름이 자연스럽진 않았다. 배우들이 노래를 잘 했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음악은 없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무언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다. 구영은 생각했다. 그저 즐기면 되겠지. 자신이 이런 것을 자주 접하지 않아봐서 뭘 잘 모르는 거겠지. 구영은 살짝 물집이 잡혀버린 발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저 배우는 원래 직업이 요리사였대요. 유학도 다녀온 유명 쉐프였는데 꿈을 바꾼 거죠. 참 멋져요. 인생에서 두 가지를 이룰 수 있다는 건요.” 구영은 옆에 앉은 정애에게 말했다.

“그러게요. 멋지네요.” 정애는 답했다.     


구영은 정애의 표정을 살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이상하게 표정이 달라진 것만 같았다. 뮤지컬에 집중하는 듯 보이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정애를 보며 구영은 자신이 무언가 실수한 것은 없는지 되짚었다. 방금도 괜한 말을 했다 싶은 기분이었다. 구영은 계속해서 발 뒤꿈치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뒷꿈치의 까진 부분이 조금씩 아파왔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은 함성과 박수를 뱉어냈다. 배우와 연출자가 유도한 반응이었다. 모두가 다 박수를 치자 정애도, 구영도 박수를 쳤다. 뒷 줄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떠 나가는 행렬에 끼었다. 구영과 정애도 그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몸이 밀렸다. 정애 또한 밀려 구영과 나란히 걷지 못하게 되었다. 구영과 정애는 사이에 세 사람 정도를 낀 모양으로 일렬로 걸었다. 박수처럼, 환호성처럼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 방금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는 과정 따윈 사라졌다. 얼른 이곳을 나가자, 이곳을 나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가자. 구영은 생각했다.

인파에 끼어 정신없이 나가는데 구영의 구두 한 짝이 벗겨졌다. 뒷사람 누군가가 구두를 밟은 듯 한데 누구인지 가늠할 수 없었고 구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구영은 당황한 채 사람들 틈을 파고 들었다. 몸을 최대한 낮춰 구두가 있을 곳을 짐작했다. 사람들 다리가 간격 없이 서 있는 건물처럼 견고했다. 그 틈을 뚫지 못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드니 그 앞에 정애가 서있었다. 정애의 손엔 구영의 벗겨진 구두 한 짝이 들려있었다. 물집 잡힌 뒷꿈치는 어쩌지 못하고 구영은 까치발을 든 채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정애는 구두를 바닥에 두었다.     


“구영씨, 긴장하지 말아요.”

정애가 웃으며 말했다.     


식당으로 향했다. 구영은 물집잡힌 뒷꿈치가 욱신거렸다. 이따금씩 그것을 생각하며 걷는데 거리에 사람이 많아 자주 몸을 부딪혔다.

구영과 어깨가 부딪힌 중년 여자가 훽- 지나가며 구영을 향해 눈을 흘겼다. 상호 관계적이랄까 쌍방향적이랄까, 딱딱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랬다. 함께 부딪힌 몸인데, 하나의 몸이 나머지 하나의 몸을 지나치게 흘겨보며 탓을 돌리는 본새였다. 분명 잘못이 일어났는데 누구의 잘못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흘겨보지 못한 쪽이 잘못한 것이 되었다. 따지는 것조차 할 수 없어지고 무엇도 주장할 수 없어지는 것이다. 그저 먼저, 조금 더 뻔뻔하게 표현하는 쪽이 피해를 입은 쪽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감, 당당함, 그런 것은 어쩌면 그렇게 표현되고 있는 건 아닐까.

구영은 몸끼리 닿는 감각이 그다지 편안하지 않았다. 몸이 몸이랑 닿아서 무엇이 될 수 있나. 몸이 몸과 닿으면 그저 불쾌한 무언가가 사이에 샘솟지 않을까. 춥거나 춥지 않고 귀찮거나 무료하고 번거롭거나 부담스러운 것들이 샘솟는 것이 아닌가. 정애와 거리를 좁혀 걷는 것도 어쩌면 그런 것이 되어버리진 않을까.     


“구영씨, 나 초콜릿 먹고 싶어요.” 오래도록 말 없이 걷던 정애가 말했다.

“초콜릿이요?”

정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영은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애씨, 여기 잠깐 있어요.” 구영은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얼마 후 다시 돌아온 구영의 손에는 작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구영은 정애에게 봉투를 건넸다. 정애는 봉투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가나초콜릿다크, 가나초콜릿 밀크, 페레레로쉐번들, 크런키, 자유시간, 빼빼로가 한데 섞여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정애가 당황해 물었다.

“초콜릿이요. 뭘 좋아할지 몰라서.” 구영이 웃었다.

“정말, 재밌는 사람이에요.” 정애가 웃으며 말했다.

“정애씨, 사실 나, 좀 긴장했어요. 실수할까봐.”

“실수할 게 뭐 있어요.”

“그냥, 뭐든 잘 하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잘 안 되는 거 같았거든요.”

“그래서, 초콜릿은 성공인 거 같아요?”

“모르겠어요. 솔직히 남들한테 잘 보이려고 막 애쓰는 그런 거 별로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내가 그러고 있네요.”

“그게 뭐 나빠요. 잘 보이려고 하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이 소중하다는 거잖아요.”

“맞아요, 그건.”

“실수 할 수도 있고, 일이 잘 안 풀릴 수도 있죠. 그게 그 사람의 전부도 아니고요.”

“긴장하지 않을 게요.”

“근데, 구두 신었네요? 발이 좀 아파보이던데.”

“오랜만에 신는 거라, 좀 어색해요.”

“앞으론 벗겨지지 않는 운동화를 신어 볼래요?” 정애가 장난스레 말하며 웃었다.     


정애는 봉투 속 빼빼로를 꺼내 구영에게 건넸다. 구영은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정애는 초콜릿 포장을 뜯어 구영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나 빼빼로는 안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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