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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Feb 21. 2019

소설 쓰는 사람, 황정은

작가님 건강하세요.^^


소설 쓰는 사람, 황정은 작가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조곤한 말투로 본인을 ”소설 쓰는 사람 황정은 입니다.” 라고 소개했다. 내겐 왠지 작가라는 말보다 소설을 쓴다는 말이 더 진짜 같았다. 선생 보단 가르치는 사람이, 의사 보단 치료하는 사람이 내게 더 가까이 있는 것 처럼.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었다. 사실은 같은 의미인데 우리말의 ‘아 ‘와 ‘어’가 지닌 어감 차이때문인지, 무엇때문인지 알 수 없는 차이였다. 그 자그마한 차이를 진짜 차이답게 느껴지도록 하는 어투, 라고 생각했다.

어투는 말 그대로 ‘투’로써만 존재하나. ‘투’에도 생각이 있다. 있을 것이다. 여러 번 곱씹어 나온 말일 수 있고 오히려 많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온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의 ‘투’는 이상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북토크 내내 귀를 사로잡는 그의 생각들이 단상 위로 흘렀다.

소설 쓰는 황정은이라는 사람은, 어딘가 세상과 멀어보이는 ‘투’를 가진 것 같았다. 세상에서 너저분하게 쓰이는 말들,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어서 유머가 될 수 없는 말들, 그저 그런 말들, 평범하고 또 평범해서 들은 것 조차 기억나지 않을 말들, 그런 것들을 다정한 ‘투’로 이야기했다. 다른 작가들과 자주 교류하지도, 새로운 사람을 빈번히 만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의 ‘투’에는 어디선가 생성되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힘들지만, 끝없이 만들어지는 다정함.

꼭 새로운 무언가를 해야지만 넓혀지는 것이 아닌, 거창하고 시원해야지만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어렵고도 쉬운 배려. 다정함. 애정. 한 발 거리를 두고, 아니 어쩌면 두 발, 세 발 일 수도 있는 넓이를 두고 애써 좁히지 않고도 그것들을 조용히 말해왔구나. 어쩌면 묵언으로 끝없이 말 해왔을 수도 있는 그의 소설.

그의 그런 ‘투’덕분에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혹은 애정하는 이를 잃어 말이 줄고 턱만 남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후반부, 그는 말했다. 누군가는 너무 뻔해서 권태롭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들이, 또 누군가에겐 고통이 될 수도 있다고. 뻔한 것을 권태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 누군가의 고통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 것 같진 않다고. 그것도 일종의 무능, 이라고.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여자로서 살아온 세월들에 어떤 무지가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모르고 살려했던 것 같았는데 지난 언제부턴가 그것을 감각하는 때가 왔다고. 시간이 지났고 자신도 어느새 ‘기성’이 되어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모르고 있었고 무지했다. 그것을 알았다. 후에 글을 쓸 후배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고 적극적으로 그런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기성’이 되고 싶다고.

난 끝까지 그의 어투에 집중했다. 말을 전하는 어투, 단어를 골라내는 그의 세심함. 글 쓰는 사람들이 고심하며 말을 뱉는 건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어투에 묻은 다정함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여운 마음이 없이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다정함. 진짜 어투. 난 한 시간 이십 여분 동안, 새로운 소설 한 편을 듣는 기분처럼 앉아있었다.

황정은 작가님은 책에도, 마지막 사인회에서도 내게 이런 말을 남겼다. 늘 건강하시라고. 그의 안부는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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