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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Feb 28. 2019

세계가 글자로 칠한 그림이라면.

'Automatism Forest' 브런치 작가 : 진달래의 상담


좋아하는 작가다. 그의 글을 보면, 자주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글도 있구나. 이렇게 쓰는 것을 좋아하고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작가도 있구나.



  눈을 감고, 일단은.

  소리를 들을래요.


  곤충 채집 소녀 또한 한때 평범한 소녀였다. 평범한 소녀라기 보다 그저 소녀에 가까웠다. 소녀는 한때 소녀다웠다. 작년에, 임종을 앞둔 외할아버지가 소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얘야, 나는 죽어 벌레들 먹이가 된다. 땅에 묻히면 벌레가 다 파먹어 새끼 치는 데 쓸 거다. 외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녀는,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는 무슨 소릴 하는 걸까. 생각하고, 질문하려 했지만 외할아버지는 싱겁게도 숨을 거뒀다. 소녀는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곤충 채집 소녀가 됐다.

  운이 좋았다면 소녀는 곤충 채집 소녀로 생활하다가 숲의 요정이 되었을 것이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수풀이 부대끼는 소리, 자박거리는 자기 발자국 소리 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시냇물은 차가울 것 같다. 수풀은 하나 같이 질길 것 같다. 내 발소리는, 어느새 나를 숲의 침입자로 확정할 것 같다. 소리는 의미가 붙는 순간 언어가 되고, 소리를 부술 정도의 괴력을 행사한다. 사람은 이를 배움이라 하는데 곤충 채집 소녀는 곤충의 원리로,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세상은 외할아버지를 땅 속으로 데려간 대신 나를 잃게 될 것이다. 그녀가 숲의 요정이 될 방법을 잃은 까닭이다.


<진달래의 상담 - Automatism Forest 중>



  애니메이션이 글로써 이야기가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분명 글자를 읽었지만 영상을 본 것만 같다. 글은 영화에 비해 시각적 자극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시각이라 믿는다면 그렇다. 하지만 읽음으로써 머릿속에 그려질 수 있는 시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글자로 그림을 그린다. 누군가는 난해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예술이 논리적인 이해의 측면만을 따지고 창작 되어야 하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에만 의존하는 예술은 온전히 '창작'된 것이 맞는가? 끝까지 '감상'을 내려놓지 말라고 주문하고 싶다.

  아름다운 장면 앞에서 이해와 납득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글자가 그린 그림을 따라가다보면, 머리가 잘린 해바라기든 요정이 나오는 숲이든 상상한 데로 이해하게 된다. 많은 독해나 공감은 요구되지 않는다. 그냥 읽으면 되고 읽음으로써 보면 된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즐기기 위해서이지, 어떤 것을 해독하는 버릇을 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브런치에선 보기 드문, 내 상상이 어디로 튈지 상상할 수 없게 하는 글이다. 심지어 해독에 대한 욕구도 자극함과 동시에 결국 그럴 수 없어 감상이 그 부분을 채우게 한다. 이 글을 쓰며 작가는 분명 신이나서 다음 장면, 장면을 써 내려갔을 것만 같다.

  세계는 분명 무언가로 채워져있다. 그것을 글자라고 믿게 하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놀이가 아닐까.


  자신이 쓰는 것을 처음으로 애정할 수 있는 사람은 작가 자신이다. 그런 기회를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얼만큼의 흥으로 글을 썼는지? (덤으로 배경 사진도 탐난다. 과도한 찬양으로 보이진 않았으면 한다.)


진달래의 상담 : https://brunch.co.kr/@broumbr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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