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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Mar 05. 2019

고요할 정, 사랑 애 ㉶

<연재 소설>


*구영의 이야기 : 잊는다는 건요.     



  내가 열 한살이었을 때, 우리 가족은 흩어졌다. 넓고 얕게. 빚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대구에, 어머니는 인천에 가 돈이 될만한 일은 무엇이든 했다. 전해들은 바였다. 내가 이렇게 바닷바람 맞으며 편히 쉴 수 있는 이유는 부모가 고생하는 덕이라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리곤 애초에 이렇게 흩어지지 않아도 됐을 법 했는데, 그것 또한 늬 부모가 못난 탓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때부터 내 가족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었다.

  난 바닷가에 살게 되었다. 집 안에 있어도 물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찰싹이나 철썩, 첨벙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다른 소리들을 비워내는 소리였다. 나는 가끔, 바다와 가까운 방에 누워 눈을 감았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몸 안에서 나는 소리와 파도 소리가 한데 묶이는 것 같았다. 두가지 소리만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곤 땅을 벗어나 몸이 뜨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바닷가 앞에 누워 여유를 부릴 시간 따위는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많은 소리가 느껴질 땐 그때 그 순간을 상기하곤 한다. 시간이 지나도 그것을 기억해낼 때면 세상엔 바다와 나, 둘만 있게 되었다. 다른 모든 소리를 차단해 버리듯이, 내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비워내는 것이다. 그게 바다가 내게 말하는 방식이었다. 오롯이 그 소리에만 집중하면, 어린 날 그때의 몸만큼 가벼워질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종종 말씀하셨다. “사람은 자기 위치를 잊어선 안된다. 알간?” 어렸던 나는 위치라는 것이 장소를 말하는 것인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그가 애정을 갖는 ‘사람의 위치’라는 것이 매번 바뀔 수 있다는 것 정도만 기억했다.

  할아버지는 매번 새벽같이 나를 깨웠다. 밥을 먹으라고 궁시렁 대기 위해서였다. 그리곤 아침마다 할머니가 차려온 밥상을 발가락으로 주욱 끌어 물에 덤벙덤벙 말은 밥을 낼름 삼켰다. 내가 밥상 앞에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 그는 내 입을 파리채로 착- 잡아채며 ‘요놈, 요 귀여운 놈.’이라고 했다. 입이 퉁퉁 부어올랐다. 그것이 우스웠는지 그는 입안에 있던 밥알이 튀는 지도 모르고 웃었다. 밥알이 튀어도 상관 없는 장소였다.

그의 위치는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밥알이 튀어도, 파리채로 사람을 내려쳐도, 다른 사람이 만들어온 음식을 발가락으로 경쾌하게 끌거나 밀어도 괜찮은 사람. 그것을 만들어 온 사람. 지금은 사라진 사람이지만 가끔 그를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그에게 어떤 위치에 있던 사람인지 묻고 싶어진다.     

  

  할아버지는 아침 6시 뉴스와 저녁 9시 뉴스를 나와 나란히 앉아 보면 세상이 마치 우리 곁에 와 친근한 말로 말을 걸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뉴스는 그런 것이라고. 사람은 뉴스를 꼭 보며 살아야 한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 알아야 한다. 세상의 중심까진 아니어도 결코 튕겨나가서는 안 된다. 그 중력, 그 그 뭐냐 중력이 맞냐? 그게 꼭 있어야 하는 거다. 그는 종종 그렇게 말했다.

  너무 많은 소리가 있었다. 사연도, 이야기도 너무 많아서 뉴스는 왜 그렇게 꼭 복잡하고 시끄러운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파도 소리를 생각했다. 그땐 시끄러운 것이 싫어 그런 놀이를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렇게 해야 난 세상과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너무 너무 졸린 날이었다. 학교에서 내준 방학 숙제로 일기를 쓰다 잠이 들었다. 밀린 보름치를 한꺼번에 쓰려니 이야기가 궁해졌다. 어떤 하루를 살았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저 마루에 누워 바닷소리를 듣거나 근처 문방구로 가 동네 친구였던 재민이 놈이랑 딱지 놀이를 했던 것, 그뿐이었다.

  이야기를 부풀렸다. 가재미도 잡고 노래미도 잡고 전복도 잡았다고, 그래서 참 보람된 하루였다고 거짓으로 적어대는 통에 그만 이야기에 빠져 잠에 들었나. 꿈에서 아버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내게 딸기 케이크를 하나 사주었다. 난 그것을 손가락에 찍어 먹어보았다. 너무 달콤해서 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았음에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분명 무슨 표정을 지었다. 그럴수록 난 케이크에 얼굴을 박고 달콤한 것들을 정신없이 먹어댔다. 데코레이션으로 올라간 딸기를 입안 가득 넣고 우물대었다. 고개를 드니 아버지는 사라져 있었다. 케이크는 거의 다 먹은 상태였고 달콤한 것도 이제 다 끝이 났는데, 아버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깨어나 보니 참 보람된 하루였다고 적은 일기장은 얼룩덜룩한 눈물로 눌려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나갔다. 뉴스를 보는 할아버지의 굽은 등이 보였다. 할머니는 부엌에 앉아 빈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뉴스에서 나오는 기자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대구 지하철, 중앙로 역, 사망자, 부상자, 용의자, 참사, 참사, 참사.... 검게 타버린 지하철 내부가 비춰졌고 사람들의 고성이 들렸다.

  재난, 이라고 했다. 나는 경험하지 않는 재난. 넓고 얕게 흩어진 사람들만 겪을 수 있던 재난. 그곳에 있지 않았으니 겪지 않아도 된, 그런 재난. 바닷소리가 평온하게 덮쳤다. 눈을 감았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길 바라서였다.

  할아버지 말처럼 사람에겐 저마다 위치가 있다면, 우리 가족이 겪어야 했던 일은 모두 위치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장소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흩어진 사람들, 그 날 그 순간 지하철을 타야만 했던 사람들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말했던 위치라는 것이 어리석게도 이해가 된 것이다. 내 아버지의 위치는 어느 곳이었냐고, 우리 가족의 위치는 어느 곳이었냐고 묻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사람의 위치를 떠나버렸다.      


  난 그날 일을 잊고 살았다. 내가 겪지 않은 것들은 잊어도 상관 없었다. 잊을 수밖에 없었다. 잊고 싶었다. 지금도 세상이 너무 시끄러울 땐 눈을 감고 그때 그 바닷 소리를 생각해낸다. 정애씨가 말했다. 잊는 다는 건, 나보다 약한 것들, 나보다 못나고 슬픈 것들만 잊는다고. 그 말이 맞을 지도 몰랐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잊고 산다. 내게 가족은, 사람의 위치를 따지던 몸, 그것에 장단을 맞출 수 밖에 없는 약한 몸, 흩어지는 차가운 몸, 그리고 잊어버리는 몸 따위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많은 것을 바랄 수 없고 그럴수록 세상은 너무 시끄럽게 변했다.


  정애씨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은데, 난 기억해내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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