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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Feb 25. 2019

고요할 정, 사랑 애 ㉵

<연재 소설>


*열아홉 염희와 정애 : 낯선 것은 무엇이 될까.     


 

녹색 칠이 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로 무릎에 닿는 돌계단이 나왔다. 깎아놓은 경사가 가파라 정애가 한 칸만 올라가도 계단 두 개 높이를 오른 것 같은 통증이 올라왔다. 그런 계단을 일곱 번 오르니 철문이 나왔다. 철이라고 하기엔 너무 쉽게 휘어질 것 같은 갈색 스테인리스 문이었다. 옥탑방, 이렇게 오르면 나오는 갈색문의 집. 염희는 짱구 인형 고리가 달린 열쇠를 문고리 주변에 갖다 댔다. 또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와.”


염희가 신발을 벗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익숙하게 불을 켰다. 기침하는 노인처럼 빛은 여러 번에 걸쳐 점차 밝아졌다. 정애는 집안을 둘러 보았다. 담뱃불로 지진 건지 뜨거운 무언가가 태운건지 모를 상처가 노란 장판 위에 군데군데 나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싱크대가 바로 나 있었다. 부엌과 거실의 경계가 모호했다. 거실이 부엌이 되고 부엌이 거실이 되는, 어디다 밥상을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구조임과 동시에 어디다 밥상을 놓아도 이상한 구조였다. 정애는 신을 벗었다.     


“집이 참 더럽네.” 정애는 말했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염희가 정애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거.” 정애는 티비 옆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이불과 옷가지를 향해 손짓했다.

염희는 급하게 그것들을 돌돌말아 한 쪽 구석으로 몰아 넣었다. 천천히 방을 살피며 정애는 노란색 장판 어딘가에 앉았다. 밥상으로 보이는 곳에 나비통을 올려두었다. 천을 걷으니 나비는 푸드덕거리며 빛에 반응했다. 염희는 싱크대 주변으로 가 덜그럭 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나비, 밥 줘야 하지 않을까.” 정애가 말했다.

염희는 둥글레차를 닳인 물과 꿀통, 작은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왔다. 물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에 꿀을 한 덩이 탔다. 나비통을 열어 조심스레 꿀물이 담긴 용기를 집어 넣었다. 꿀물 주변을 빙그르르 돌던 나비가 플라스틱 용기 위에 앉았다. 촉수를 힘껏 세우더니 꿀물을 빨았다. 염희와 정애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염희는 둥글레차를 정애에게 건넸다.     


“나비를 왜 키워?” 둥글레차를 건네 받으며 정애가 물었다.

“넌 이게 키우는 걸로 보여?”

“그럼?”

“같이 사는 거지.”

“네가 먹이도 주고 집도 제공해 준 거잖아.”

“얜 원래 바깥이 집이고 꽃이 주식이야. 내가 안 데리고 와도 살 수 있어.”

“그럼 질문을 바꿀게. 넌 얠 왜 데려왔어?”

“바깥은 너무 낯설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바깥에서도 살 애라며.” 정애는 우스운 듯 물었다.

“원래, 자기가 살아야 할 곳이 더 위험한 법이야.”


염희는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통기타 하나를 들고 나왔다. 염희는 자세를 고쳐잡고 기타 줄을 가볍게 튕겼다.     


“너 원래 기타도 쳤니?” 정애가 물었다.

“삼촌이 사준 거야.”

“누가 사준 건지 물은 건 아니야.”

“나한테도 이런 물건 하나쯤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넌 진짜 제멋대로 생각하는 게 있어. 내가 널 무시할 거라고 생각하니.”

“너랑 얘기하는 거 너무 재밌다.”

염희는 웃으며 기타를 쳤다. 투박한 소리가 손가락끝에서 튀어나오며 가락을 만들었다. 듣기 좋은 멜로디였다. 무슨 곡인지 알 순 없었다. 정애는 갑자기 모든 게 새로웠다. 자신이 염희 집에 와 있는 것도, 나비에게 밥을 주고 염희의 기타 연주를 듣는 것도, 무엇보다 자기 손에 들린 둥글레차. 가장 가까이서 감각하고 있는 컵 하나도 낯설었다. 누군가와 가까워 진다는 것은, 생경한 느낌을 생경하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오게된다는 뜻인 것만 같았다. 염희와 가까워지는 게 맞나, 자신은 염희와 가까워지고 싶은 것은 맞나. 그럼 어떤 모습으로 가까워 지는 거지. 생각하는 새에 염희가 말했다.

     

“오늘, 네가 자고 갔으면 좋겠어.”


정애는 컵을 움켜쥐었다. 이빠진 부분의 균열이 생경했다. 지나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텐데도 컵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자신을 어떤 곳으로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것만 같았다.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이 정애는 가장 무서웠다.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늘 그런 식으로 찾아왔다. 낯설게, 차갑게, 지나치게.


“왜?” 정애가 물었다.

“내가 자꾸만, 약해져 정애야. 난 분명 죽으려고 해. 죽고 싶어. 근데 난 이상하게 네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갔으면 좋겠어.” 염희가 말했다.

“왜 죽어야 하는 거야? 네가 꼭 죽지 않아도 되잖아.”

“그러니까. 난 죽고 싶은데, 내가 굳이 죽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 그게 무섭다 정애야 나는. 그게 무서워.”

      

시계 초침 한 칸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감각이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느꼈으면 염희도 느꼈을 것이었다. 그래도 뭐든 무서워 하는 쪽은 자신보단 염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정애는 생각했다. 정애는 컵을 내려놓고 염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염희는 기타를 품에 안고 고개를 떨궜다. 염희 손가락이 기타줄을 모두 거치며 미끄러져 내렸다. 둔탁한 소리가 단계별로 이어졌다. 좋지 못한 소리였다.

정애는 염희를 끌어 안았다. 등을 토닥였고 손을 잡아주었다. 염희는 울지 않았다.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정애가 말했다.

“죽는 것보다 더 추한 건, 살고 싶어한다는 거야. 누구라도, 내 다짐을 무너뜨려주길 바라고 있었던 거야. 그걸 나한테 들켜버렸어.”

“추하지 않아. 다들 살고 싶어해. 사람한테 그것보다 큰 욕구는 없어.”

“사실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네가 다가와 주기를. 누구라도 나를 걱정해주고, 욕을 퍼붓는다 해도 계속 말 걸어주길. 호기심 이라고 해도, 지금 네가 이렇게 나한테 다가오는 것들 때문에 난, 내 결심을 바꾸고 싶단 생각까지 해. 무서워 정애야. 내가 무슨 마음인 걸까. 너는 아니. 혹시 너도 같은 마음이니. 내가 구차한 걸까. 더이상 초라함을 느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염희는 많은 말을 쏟아냈다. 정리되지 않은 말들 사이에 온기가 느껴졌다. 불안함이 깔린 온기. 그래, 역시 살아있는 사람은 무엇에든 불안해질 수 있었다. 까마득한 기운. 그런 기운에서 느낄 수 있는, 살아있음을 말해주는 노골적이고 추한 냄새. 두려움 속에서 살더라도 살고 싶은, 누구든지 사랑하고 싶은 무언가. 그런 끈질긴 생의 냄새에 정애는 묘하게 매료되었다.

    

“계속 내 곁에 있어줘 정애야. 날 잊지 말아줘.”

염희는 정애에게 안겨서 웅얼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럴게.” 정애는 말했다.      


염희의 몸이 낯설었다. 정애는 염희도 자신과 같은 것을 느꼈을 거라 짐작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앞으론 어떻게 해야할지 까마득했다. 정애는 생각했다. 낯선 것은 무엇이 될까. 결국엔 뭐든 무언가 되어가는 형태로 죽어갈 테지만, 모든 게 없어지는 과정에서만 납득 되는 걸까. 모든 건 낡고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나. 마음이 커지면, 그만큼 다른 부분은 작아지고 결국엔 사라지겠지. 그렇게 다른 것들을 죽일만큼 계속 계속 풍선 부풀 듯 마음이 커지면, 결국엔 낯설었던 네가 커다란 모형처럼 보일지도 몰라. 그 모형이 완전히 내 몸보다 커졌을 때, 그때 네가 떠나가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난 어떻게 되지? 네가 죽으면 너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네 기타 소리를 들었던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넌 절대 나보다 커져선 안돼. 넌 불행하지만 그냥 이렇게라도, 살아. 나보다 앞서가지 마.


정애는 염희의 구멍난 팔뚝을 꽉 잡았다. 죽어가던 형광등 한쪽이 끝내 빛을 거뒀다. 거실 한 편이 어두워졌고 방바닥 위에 어렴풋이 그림자가 졌다. 못난 모습으로 엉킨 정애와 염희의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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