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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자 Dec 26. 2016

마흔 번째 잔 - 본능

매일매일 글쓰기

주제: 본능


 본능 앞에서 의리따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영선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영선은 굳이 인위적인 향기를 흘리지 않아도 상대가 다가올 수 있게 만드는 미주의 탁월함에 주눅이 들었다. 미주를 친구로서 애정하며 지내온 세월은 가늠하기 버거웠지만 자꾸만 올라오는 생존본능인 질투앞에서 무너지는 시간은 단 몇 분이면 충분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을 뽐내는 자리에서는 친구사이의 양보란 거추장스러운 미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영선에겐 미주 또한 잃어선 안 되는 돈독한 친구였다. 피 한 방울 나눈 적 없는 남이었지만 가장 가까웠던 연인과 헤어지면 언제고 돌아올 수 있는 품을 내주는 형제와도 같았다. 미주를 질투함으로써 자신의 못남을 인정할 것인지, 그와 자신은 다른 사람일뿐이라는 아주 고차원적인 성스러움으로 열등한 자신의 처지를 위로할 것인지 선택해야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꽤 걸리는 작업이었다. 이 세상에서 숨겨뒀던 본능이 풀가동되는 것만큼 시간이 덜 걸리는 작업은 없었다. 그럼에도 영선은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정신으로 조각난 자존심을 챙기기 시작했다.

 “부럽다. 너랑 잘 어울려. 선남선녀야.”

시답잖은 질투도, 괜시리 비죽대는 것도, 미주가 원하는 대답을 끝까지 해주지 않으려는 심통도 모두 다 열등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영선은 아주 적절하고 솔직한 대답을 내놨다고 생각했다. 그냥 조금의 부러움과 그 둘을 인정하는 표정을 주는 것. 그것이 미주와는 달리 감추고 싶은 본능적인 감정을 인정하는 대인배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늘상 모여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남을 헐뜯어 비난하는 것으로 질투의 힘을 대신하며 살아갈 순 없었다.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올라오는 질투의 본능은 그런 영선도 피할 수 없는 조건반사와 같은 반응이기도 했다. 영선은 생각했다. “너도 결국 똑같아.”와 같은 단죄의 수치심을 피하려면 기꺼이 솔직해지는 방법밖엔 없다고. 이를테면 영선 자신이 먼저 본인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해 남들 앞에 거리낌없는 모습으로 내놓는 것이다. 그것이 모른척 감췄다가 누군가에 의해 들킨 뒤 그 순간 그에게 나를 파악했다는 호기로운 감정을 느끼지 않게끔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영선에게 있어 솔직함은 곧 열등감의 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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