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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헤 Aug 16. 2024

브뤼셀 그 집

이번 여행에서 내가 벨기에에 가는 목적은 단일했다.      


벨기에식 감자튀김을 먹고 싶어서.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몇 해 전의 스페인 여행에서 길거리를 지나다가 ‘벨지안 프라이’라고 파는 걸 먹었다. 너무 맛있게 먹어서 여행 기간에 몇 번 더 사 먹었었는데 그땐 몰랐지, 그게 몇 년이 지나도 두고두고 생각이 날 줄은. 그래서 영국과 체코 사이에 굳이 끼워 넣은 여행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


나에게 여행지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숙소!”라고 외칠 만큼 숙소가 가장 중요한 나.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한다면 호텔을 가장 선호한다. 새하얗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공간. 이전의 손님이 누구인지 유추할 수 없는, 그 공간의 과거가 신경 쓰이지 않는 공간.


보통 나는 가보고 싶은 장소들에 따라서 숙소를 정하는데 브뤼셀은 ‘벨지안 프라이‘라는 사소하고도 중대한 이유 하나로 넣은 여행지라 딱히 가고 싶은 곳이나 보고 싶은 곳이 없었다. 숙소를 예약하려고 보니 브뤼셀은 작은 도시답게 중간급의 숙소는 많지 않았고 나의 선택지는 저렴한 호스텔이나 비싼 호텔 둘 중 하나였다.


이 박만 겨우 할 도시라 경비도 아낄 겸 욕심을 버리고 적당한 곳에서 대충 자고 싶었는데 양극단의 선택지에서 머리 싸매고 고민하다가 겨우 떠올린 에어비앤비라는 옵션.


사실 에어비앤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전 여행에서 몇 번 가봤을 때 이렇다 하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기도 했지만, 비위가 좀 약한 편이라 낯선 이의 생활감이 묘하게 느껴지는 공간은 나에게 전혀 메리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도 어딘가에서 숙박은 해결해야 하고, 그런데 굳이 좋은 곳에서 자고 싶지는 않고 그러나 깊은 고민... 따위는 사치, 시간이 없었다. 저는 나머지 중요한(벨지안 프라이보다는 더 중요한 이유가 가득한) 네 나라의 숙소도 찾아야 했단 말이죠? 그래서 대충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곳을 찾았다. 그곳은 주요 거점에서는 조금 벗어난 곳이지만 중심지에서 그럭저럭 걸을 거리에 적당한 가격대라 깊이 살피지 않고 덜컥 예약금을 걸었다.   

   

그렇게 브뤼셀 숙소의 예약을 해치우고 어느덧 여행 날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 에어비앤비는 어째 들어가기 전부터 삐걱댔다. 이틀만 묵을 집이라 잘 찾아보지 않고 가볍게 생각한 게 문제였을까. 보통 어떤 것을 선택하기 전에 정보는 꽤 상세히 찾아보는 편인데 갑자기 꽂히면 또 세세하게 들어가서 살펴보지 않는 이놈의 이중적인 성격 때문에 대충 고른 집.      


*


도착 전에 호스트가 계속 나의 도착 예상 시간을 묻길래 그제야 ‘아 여긴 셀프 체크인이 아닌가? 키를 직접 전달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사진으로 신상을 미리 알고 있긴 했지만,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못 해도 60대 후반은 되어 보이는, 여름이면 왠지 아직도 서핑할 것만 같은 잘 그을린 피부를 가진 백인 할아버지였는데 그를 보고 아뿔싸 싶었다. 누가 봐도 ‘나는 지금 내 집에서 쉬는 중이야’ 차림이었기 때문에.


그때 깨달았다. 내가 집 전체 예약이 아닌, 집의 개인실 한 공간을 예약했다는 것을. 집주인이 함께 거주하는 곳은 처음이어서 놀랐지만 바로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30kg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끌고 택시와 기차, 그리고 또다시 택시를 타고서야 겨우 도착한 곳이었고 날은 너무 더웠고 계속된 이동으로 나는 이미 혼이 나가 있었으므로. 에어비앤비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가 어떤 공간 유형인지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은 잘못이지 뭐.      


*


로프트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던 나는 사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바로 나온 생활공간에 당황했다. ‘아니 이런 건 영화에서나 보던 주거공간인데 이게 뭐람?’ 어리둥절. 로프트의 사전적 의미는 공장 같은 곳을 개조해서 만든 공간으로 특색 있는 주거공간을 뜻한다. 그 에어비앤비는 건물의 중간 부분이 비어있어 다른 층을 올려다볼 수도, 내려다볼 수도 있는 특이한 구조의 로프트로 건물의 한 층을 한 집이 다 쓰는 곳이었다.


     

연속되는 당황스러움 속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불어의 억양이 섞인 영어를 우다다다 쏟아내는 호스트의 말을 알아들으려 애썼다. 내가 그에게 도착 시간을 하루 전 저녁 늦게 겨우 대답해 주고 또 당일에 시간을 바꿔서 자기가 스케줄을 바꿔서 집에 왔다는 살짝의 면박과 함께 불친절한 듯 친절한 집 설명까지.


아니 저도 제가 아저씨가 같이 사는 곳이고, 집 열쇠를 직접 받아야 하는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저 시간 약속 잘 지키는 예의 바른 사람입니다.      


호스트의 설명을 들으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또 한 번 놀랐다. 감각적으로 쌓아 올린 에르메스의 오렌지색 박스가 산처럼 쌓여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였을까요? 이 집이 내 마음에 들기 시작한 순간.     





*


ㅁ 모양으로 되어있는 로프트의 1/3 정도가 게스트용 공간이었다. 현관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게스트용 화장실이 있었고 가장 안쪽에는 개인 욕실이 딸린 침실이 있었다. 화장실과 욕실에는 전부 에르메스의 어메니티가 놓여있었다. 비누 케이스 같은 건 꽤나 낡아 보여서 아마 빈 병에 리필만 하는 것도 같았지만.


천장부터 바닥까지 시원하게 뚫린 큰 창에 휘장처럼 드리워진 보라색 벨벳 커튼. 한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인 딥그린으로 칠해진 벽. 게스트룸인 만큼 많진 않아도 적당히 특색 있을 만큼 곳곳에 장식품들이 있었다. 보통 장식품들이 있는 곳은 아무래도 관리가 까다로워 청결도가 높지 않을 수 있는데 그곳은 새것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깔끔하게 구석구석 관리되어 있었다.      


*


그곳에서 소소하게 불편했던 점이라고 하면 게스트용 침대는 저렴한 싱글 침대를 두 개 붙여놓았는지 삐걱거리고 스프링이 묘하게 느껴졌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아무리 할아버지라지만 낯선 이성이 있는 집에서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잠기는 시늉만 간신히 내는 것 같은 ㄱ자 모양의 잠금쇠 하나 달랑 걸고 자려니 어찌나 마음이 불편하던지...


게다가 욕실은 방 안에 있었지만 왜 화장실은 문밖에 있으며 나는 편한 옷은 왜 이렇게 짧고 얇은 잠옷만 가지고 왔는지... 저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나는 방 밖에 나갈 때마다 나의 차림새가 신경이 쓰였다. 아 유교걸...     


*


그렇게 다소 신경 쓰이는 밤을 보내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어제 제대로 보지 못한 집을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다.


호스트한테 인사를 하고 잠깐 대화를 나눴다. 밤에 내가 통화하는 게 조금 시끄럽게 들렸는지 메시지로 문을 닫아달라고 와있던 걸 아침에 확인하고 무안했던 차였다(하지만 문은 당연히 닫혀 있었고요... 창문이 조금 열려있었답니다). 대충 메시지를 아침에 봤고 시끄러웠다면 미안했다는 대화하고 있는데 어라 또 누가 나온다....?


아니 내가 조금 전까지 이야기한 할아버지는 애인인지 친구인지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사람을 이렇게 못 알아볼 수 있나 당황스러웠다. 옆에 두고 보니 너무나도 다른 외형의 사람이었는데 첫날은 워낙 경황없이 잠깐 인사만 나누었던지라 잘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꽤나 익숙한 듯 맥북을 두들기는 그의 친구(애인...?) 옆에서 다시 한번 호스트와 인사를 하고 커피를 한 잔 내려줘서 엉거주춤하게 소파에 앉아 집을 둘러보았다. 연하게 내린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어느새 옆에 다가온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게스트룸에서도 호스트의 취향이 느껴졌지만, 방 밖으로 나와서 둘러본 집은 내 표현력의 한계가 아쉬울 정도였다. 거실은 크게 두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소파와 티브이가 있는 거실 같은 공간과, 장식 선반들이 있는 공간이었다.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콘솔형 책상이었다. 나뭇결이 독특하고 꽤나 앤틱해 보이던 가구와는 대조적으로 한가운데는 맥북이 놓여있었다(그게 어쩜 그리 잘 어울리던지요). 작년에 이사하면서 내가 그토록 찾던 디자인의 책상. 여기 있었네, 이곳 벨기에에.      


거실 공간의 장식 선반에는 청담동의 편집샵에서나 볼 수 있는 이탈리아의 명품 자기 브랜드인 지노리 1735의 접시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인 포르나세티의 화병과 캔들이 있었고 석상 같은 오브제, 그리고 책이 가득했다. 화려한 패턴이 가득 수놓아진 카펫이 이곳저곳에 깔려 있었고 중간중간 무심히 놓인 조명들이 공간에 생기를 더해주었다.


독자들의 상상을 위해 사진은 여기까지


또 다른 한쪽에는 술과 관련된 식기류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요즘 한국에서도 유명한, 사람 모양의 알레시 와인오프너가 매장처럼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고 위스키와 와인 잔들 그리고 칵테일 쉐이커들과 아이스 버킷까지. 그 사이에는 사진과 그림들도 여러 점 걸려있었고 게스트용 화장실에조차 사인이 되어있는 일러스트들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빈틈이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어느 곳에 눈을 돌려도 볼거리가 가득했다.      


오랜 시간 공들여 하나씩 모은 것 같은 수집품과 장식품들은 그의 취향이 가득했고 감각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풍스러운 것들과 현대적인 것들이 적절히 한데 어우러져 있었고 그러한 어우러짐이 이 공간을 한층 고급스럽고 세련되어 보이게 했다. 가만히 하나씩 보고 있으니 그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박물관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소파, 작은 테이블, 캐비닛, 의자, 책상 각기 개성이 있는 모양과 색깔들이었는데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


속으로 감탄을 거듭하며 커피를 마시다 흘긋 바라본 할아버지는 핸드폰으로 루이뷔통 남성 가방류를 검색하고 있었다. 진짜 이 할아버지 취향 너무 멋져.


이 에어비앤비는 가격이 저렴한 편에 속했는데 그래서 든 생각이 이 할아버지 돈을 벌기보다는 ‘방 놀리기는 심심한데 가끔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그러게 에어비앤비나 해볼까?’의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이 집은 생활공간의 느낌보다는 별장의 느낌으로, 예쁜 것들만 모아둔 휴식처의 느낌이었다.


모두가 그리는 여유로운 삶의 정수와도 같았던 집.      


사람 손길이 익숙한지 쓰다듬는 걸 허락한 고양이, 백인 할아버지 둘, 영어도 불어도 잘하지 못하는 I 성향의 동양인 여자 하나와 밖에 안 나가고 구경만 실컷 하고 싶은 소품이 가득한 집.


무엇 하나 자연스러운 게 없었는데 그토록 어울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고요히 스며들어 있고 싶었다.      


*


그렇게 집 구경을 한참 한 뒤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을 나와 브뤼셀 시내를 구경했다.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웬 개 짖는 소리? 집 안을 흘긋 보니 호스트가 손님들을 초대했는지 예닐곱 명의 백인 아줌마 아저씨들이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에게도 함께 하겠냐 물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나의 아주 작은 E 자아를 꺼낼 자신이 없어 정중히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파티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듯했는데 나는 그 방 한 켠에 객식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외로웠다. 셋방살이하는 설움이 이런 걸까 싶었던 밤.      


*


사실 브뤼셀에 기대했던 것이 없었으니 그 파티에서 놀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 그때처럼 나의 영어 실력과 붙임성이 아쉬운 순간이 없었다.


그랬으면 별생각 없는 브뤼셀 투어보다 할아버지랑 집 얘기를 신나게 했을 텐데. 어떻게 그런 감각적인 것들을 모으게 되었는지, 뭐 하시는 분인지 저 오브제들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나에게 알 길 없는 궁금증으로 남았다.      


다시 브뤼셀에 간다면,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정정하게 호스트로 계신다면 꼭 다시 가고 싶은 곳. 에어비앤비에 대한 편견을 깨고 새로운 곳들에 도전하고 싶어지게 한 곳.


여담으로 그 뒤 오스트리아에서는 그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숙소인 고급 호텔이었는데 브뤼셀 그 집에 묵은 뒤로 새하얀 호텔의 방이 그때처럼 재미없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그 집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내가 혹여 싱글 라이프를 살게 된다면, 언젠가 돈은 있고 가족은 없고 그래서 돈 쓸 곳이 남아돈다면 꼭 그렇게 꾸며놓으리라. 그렇게 별 기대 없었던 벨기에와 그곳의 숙소는 훗날 내가 살고 싶은 집의 완벽한 레퍼런스가 되었다.     


아 그래서 감자튀김은 먹었는지 어땠는지 혹시 궁금해하실까 봐 말해드리자면, 감자튀김은 이 박 삼 일간 두 번 먹었다. 사실 처음 먹고 실망해서 두 번째는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 여길 굳이 와서 먹을까 싶어서 그다음 날 또 먹었다. 놀랍게도(당연하게도) 맛있었지만, 추억 속 그 맛은 아니었다.     





그래도 감자튀김 하나 때문의 내 로망이 된 집을 만났으니 그럼 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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