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과 평판

by RUKUNDO
소문 所聞
(명사)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전하여 들리는 말.
평판 評判
1.(명사) 세상 사람들의 비평.
2.(명사) 비평하여 시비를 판정함.


회사는 조직이다.

이 거대한 생명체를 움직이는 것은 절차, 규정, 지시사항, 그리고 보고서다.

조직은 법과 규정으로 뼈대를 세우고, 절차로 살을 붙인다. 지시사항으로 움직임을 부여하고, 보고서로 행위를 증명한다. 그게 조직의 생리다.


회사는 사람이 모인 곳이다.

사람이 모여 회사를 구성한다고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사람은 너무 소소하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내뱉는 ‘말’은 결코 소소하지 않다. 소문이라는 이름으로, 평판이라는 이름으로 회사의 공기를 만든다. 이 공기는 지구를 덮는 오존층처럼 회사를 둘러싸고, 때로는 개개인을 덮는다.


말이 말을 만드는 세상이다.

가벼운 대화, 담소, 상담, 소통, 수다, 잡담, 면담까지 대상이 있는 말의 자리는 모두 소문과 평판을 만든다.


소문은 신뢰도는 낮지만 확산성이 좋다.

바람처럼 빠르게 퍼지지만, 또 흔적 없이 사라진다.


평판은 소문에 비해 신뢰도가 높다.

그러나 형성되는데 시간이 걸리고 흔적이 남아 누군가의 정체성을 만든다.

회사에서 ‘생각 없이 하는 말’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소문과 평판에 대한 정의마저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회사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인사이동철만 되면 전화와 메신저가 바빠진다.

가장 흔한 질문은 “이 사람 어때?”

대답도 내 평판이 되기 때문에, 답변은 조심스럽다.

질문자와 관계에 따라 대답의 톤이 달라진다.

친한 동기나 동료들에게는 진솔하게 답변을 하려 하지만, 그래도 암호 같은 문장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잘 모르겠어.” = 가능하면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나쁘진 않아.” 혹은 “착해” = 일적으로는 엮이고 싶지 않다.

“좋은 사람이야” = 포장이사 대상이니 알아서 판단해라.

이런 전형적이고 단답형인 답변이 돌아오면, 대부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여기서, 포장이사란 소문과 평판을 총동원해,

한 사람의 이미지를 좋게 포장해 다른 팀이나 사업소로 보내는 일을 비꼬는 말이다.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왜 굳이 그렇게 애써 보낼까? 잡고 싶지 않을까?

지나치게 좋은 평가만 있는 사람은, 오히려 더 경계하게 된다.

이렇다 보니, 소문도 평판도 신뢰도가 낮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사실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이나 평판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어차피 그 사람이 오는 건 정해진 일이고, 설사 내가 싫다고 막을 수도 없다.

같이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보면, 내 일도 피곤해진다.

회사라는 곳은 결국 ‘일’을 하러 오는 곳이니, 일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평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소문과 평판이 구분 없이 뒤섞여 돌아다닌다. 목소리 큰 사람, 시끄러운 사람들이 만든 말이 ‘공식 평가’가 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각 본부마다 주요 업무로 ‘시끄러움을 담당하는 사람’이 한 명씩 있다.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잘 보이려 애쓰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못 하겠다.


오늘 있었던 따끈따끈한 일이다.

직원 A가 직원 B에게 업무에 대한 개선을 요구했다. 전해 들었지만, 들을만한 것이었다.

직원 B는 앞에서는 아무 말 없이 듣더니, 뒤에서는 악의적인 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어린 직원이 자기 업무에 지적을 한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하필 쓴소리를 들은 직원 B는 우리 회사의 유명한 스피커였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찍고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질러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간단한 업무 개선을 요청했던 직원 A는

나이도 어린 주제에 남의 업무에 참견하고, 평가하는 이상한 직원이 되었다.

게다가 같이 근무하는 동료직원에게 폭언을 퍼부은 미친 사람이 되어있었다.


옆에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머리와 마음이 복잡했다.

고기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서로 물고 뜯고 씹고 맛을 보려는 걸까.

기분이 상했으면 만나서 풀면 될 일이다. 하지만 저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서로에게 좋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방관하는 내가 비겁했고, 미안했고, 이런 회사에 구성원이라 부끄러웠다.


말은 말을 만든다.

그리고 혀 밑에는 도끼가 들었다.

내가 알든 모르든. 내가 한 말이 다시 말로 돌아올지, 도끼로 돌아올지 모를 일이다.


내가 가볍게 던진 평가 한 마디가, 결국 도끼로 돌아와 내 목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문과 평판에 휘둘리는 회사에 살다 보니 결국 말의 힘과 공포를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귀를 닫을 수도 없고, 입을 닫을 수 도 없으니 난처한 일이다.


성능 좋은 필터가 있어 이런 것들이 잘 걸러지면 좋겠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려운 게 조직이고, 사람인 것 같다.

말이 무섭고 사람은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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